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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인터뷰

줌인(Zoom-In)

“방송은 나의 삶이고 내 인생이었다”

95세 최고령 아나운서, 위진록 선배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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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세월, 국내외 역사의 소용돌이 현장에서 마이크를 잡고 방송을 했던 재미교포 최고령(95세) 원로 아나운서 위진록. ‘1950년 6·25 한국전쟁 발발 1보’ 방송 기록을 세운 그가 걸어온 방송의 발자취와 증언을 통해 현재 진행형 한국 아나운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재조명해 보았다. 위진록 선배는 1928년 황해도 재령에서 출생해, 19세 때인 1947년 9월 1일, 서울중앙방송국(KBS 전신) 아나운서로 방송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올해로 방송 인생 76년이 되었다.

6·25전쟁 정전 70주년을 앞둔 지난 7월 7일, 한국아나운서클럽 미국 서부지부 창립 모임에 참석한 원로 아나운서 선배를 한국아나운서클럽 미주지역 정영호 편집위원(전 미주방송인협회장)이 만났다. 1972년 미국으로 이주해 현재 미국 LA 서남쪽 가디나市(Gardena City)에 살고 있는 위진록 아나운서는 95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인터뷰 내내, 살아 온 날들에 대한 또렷한 기억과 정확한 발음으로 방송 인생 가운데 극적인 순간을 생생하게 전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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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정정하시고 젊게 사시는 것 같습니다, 선배님.

“고맙습니다. 젊게 봐줘서. 늘 새로운 것을 상상하며 살고 있는데 아마 그게 정신건강은 물론이고 몸에도 좋은 거 같아요. 지금도 잠들기 전에 침대 머리맡에 놓아둔 백과사전을 집어 들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지는 대로 읽어보다가 잠드는 습관이 있어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 보는 나름의 루틴이지요. 근데, 젊게 산다고 얘기할 때는 나이보다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마음의 상태가 어떠한가를 기준으로 얘기해야 하는 게 아니겠어요? (웃음) 이렇게 뇌 운동하고, 식사 잘하고, 매일 5,000보 정도 꾸준히 걷고, 잘 자고, 주일에 성당에 나가 사람들 만나기도 하고 또 이렇게 아나운서 후배들도 만나기도 하고 이러는 게 건강에 참 좋은 거 같아요. 취미생활도 필요해요. 저는 클래식 음악을 듣거나 세계 명작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하루하루 잘 지내고 있습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관심이 여전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선배님께는 ‘현존하는 과거와 미래’라는 표현이 어울립니다. 오늘은 현존하는 과거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부터 아나운서 생활을 시작하셨지요?

“네, 우리나라 격동기인 1947년 9월에 서울중앙방송국(KBS 전신) 아나운서로 입사했어요. 3명 모집하는데, 응모자가 200명 정도 몰렸던 것 같아요. 담당 시험관이 민재호 대선배님이셨습니다. 제가 일제강점기에 북한에서 태어났고, 일본어로 사범학교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해방이 됐는데도 우리말하고 한글 문장이 익숙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종로 화신백화점에서 시작해 탑골공원까지 오가면서 건물에 붙은 벽보를 하루에도 몇 번씩 소리 내서 읽었었습니다. 이북 사투리 문제가 자연스레 해결됐지요. 성우 경험도 있고 해서 발음에 문제가 없었는지 다행히 합격했습니다. 제 동기가 서명석, 박광필이었어요. 둘 다 6·25 후에 행방불명되거나 방송국을 그만둬서 입사 동기 중에는 나 혼자만 방송을 계속했습니다. 19살 나이에 국영 방송인 서울중앙방송국 아나운서가 된 것은 제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겁니다.”

위진록 선배는 입사 후 일기예보, 물가 시세, 방송 순서, 공지 사항 같은 신입 아나운서들이 하는 업무 외에 자신이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 방송을 자진해서 맡아 했다고 한다. 입사 전 라디오 드라마 성우 경험을 살려 ‘심청전’,‘장화홍련전’, 셰익스피어의 원작 베르디의 오페라 ‘오텔로’같은 무대극 중계방송도 실감나게 했다고 자서전에 기록하고 있다. 입사 1년차에는 서울중앙방송국 주최 제1회 방송극 현상 공모에 당선되기도 했다.

 

당시 같이 근무했던 분들이 기억나는지요?

그럼요. 제가 입사할 때 아나운서실에 근무했던 분들을 기억해 보면, 방송과장에 이계원, 과장서리에 민재호, 방송계장 윤길구, 그리고 선배 아나운서로 전인국, 윤용로, 홍준, 팽진호(월북), 강문수, 조준옥, 홍양모 아나운서가 계셨고, 1948년 이후에 입사한 후배로 장기범, 최승주, 임채흥, 민영환, 고승규 아나운서가 있었습니다. 그중에 제게 응시를 권하고 저를 뽑아준 민재호 대선배님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분은 스포츠 중계방송의 개척자이셨고, 방송계의 전설이었지요. 제가 입사한 다음 해인 1948년,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 중계방송인 런던 올림픽 중계방송에서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로 오프닝을 했던 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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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NHK 스튜디오에서 VUNC 방송

매년 6·25를 전후해서는 북한 공산군의 남침 1보를 방송한 선배님 인터뷰 기사가 매체에 나오곤 했는데요. 올해도 이곳 신문에 나왔습니다.

“네, 지금도 그때 상황이 또렷하게 기억납니다. 6월 24일 토요일 밤 11시에 방송을 끝내고 숙직실로 쓰고 있는 제2 스튜디오로 갔습니다. 그런데, 6월 25일 새벽 5시 10분쯤에 누군가가 퉁탕거리며 숙직실 문을 열고 들어와서 나를 깨우는 겁니다. 정신을 못 차리고 눈을 비비고 있는데, 문 앞에 방송국 수위하고 군인 한 사람이 서 있는 거예요. 자신을 박 대위라고 소개하면서 종이 한 장을 내밀고는 즉시 방송하라고 명령하듯이 말했죠. 내가 머뭇거리자 박 대위는 허리에 찬 권총에 손을 대는 듯한 자세를 취했습니다.

무척 놀라셨겠습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어요. 그때 아침 정규 방송 시작은 6시 30분으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죠. 아직 방송 시작 전이고, 이렇게 중요한 내용을 상부 허락 없이 내 맘대로 방송할 수 없다고. 그리고는 민재호 방송국장에게 연락했습니다. 국방부에 확인을 마친 민재호 국장이 방송국으로 달려왔습니다. ‘개성이 벌써 함락됐으니까 원고를 준비해서 빨리 방송하라’고 지시를 해서 긴급으로 임시뉴스를 했습니다. 그때가 아침 7시쯤 됐을 거예요. 22살, 3년 차 아나운서의 가슴 떨리는 방송이었습니다.”

“임시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임시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새벽 북한 공산 괴뢰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새벽....”

[크기변환]21951년 부산 피난시절 최창숙 아나운서. 앞줄 왼쪽부터 최창숙,김순철,정순형 아나운서. 뒷줄 왼쪽부터 강찬선,강익수,양재현,양대석,윤길구,이수열,임

9·28 수복 때도 육성으로 첫 방송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울이 북한 인민군에 함락된 뒤에도 저는 미처 남쪽으로 피난 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9·28 수복 때까지 약 3개월 간을 문산(배우 최무룡 집)과 고량포에 피신해서 숨어 살았어요. 천만다행으로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면서 그해 9월 28일 국군이 다시 수도 서울로 들어왔지요. 그 소식을 듣자마자 베잠방이 바람으로 안암동에서부터 정동에 있는 서울 중앙방송국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정동에 있던 방송국은 폭파돼 흔적도 없었습니다. 다시 서대문을 거쳐 송신소가 있던 마포 당인리발전소로 갔더니 다행히 연희송신소는 그대로 있었습니다. 빨갱이들이 송신소를 파괴할 여유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기술자 몇 명이 남아 있어서, 그곳에 임시로 작은 스튜디오를 꾸미고 9.28 서울 수복 첫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21951년 부산 피난시절 최창숙 아나운서. 앞줄 왼쪽부터 최창숙,김순철,정순형 아나운서. 뒷줄 왼쪽부터 강찬선,강익수,양재현,양대석,윤길구,이수열,임택근,한희동 아나운서

“서울 시민 여러분!,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우리의 수도 서울이 탈환됐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유와 평화를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반복 방송). 오늘 새벽 UN군과 대한민국 국군은 수도 서울을 완전히 탈환하고....(하략)”

“이렇게 시민들에게 부르짖듯이 방송을 되풀이했습니다. 그런 뒤에 ‘HLKA 여기는 서울중앙방송국입니다’라고 알리는 것이 얼마나 신나고 자랑스러웠는지 모릅니다.”

 

6·25 전쟁 이전에도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방송 기록들을 남기셨는데요. 

“우선 1948년 5.10 첫 국민투표의 개표 결과를 중앙청에서 생중계한 게 기억나고요. 그다음에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경축 행사 중계에도 참여했었어요. 1949년 7월 5일 에 거행된 백범 김구 선생 장례식 때는 효창공원에서 하관식 생중계를 맡았었죠. 그때 국민장 실황 방송의 추도식 중계는 민재호 아나운서가 했고요. 장송 행진 중계는 홍양보 아나운서가 맡았었습니다. 그 하관식 중계가 제 방송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위진록 선배는 하관식 중계를 위해 김구 선생의 전기를 읽고, 평소 가깝게 지내던 분들을 만나 자료를 수집했으며, 장의사를 찾아가 절차와 의식을 배운 뒤에 어렵게 방송 원고를 썼다고 한다. 떨리는 마음으로 현장에 갔지만 큐 사인 직전 방송국장이 갑자기 원고를 빼앗아 가는 사태가 발생했다고 한다. 너무 슬프게 진행해 민중들을 자극하지 말라는 당국의 지시 때문이었다. 순간 당황하고 정신이 없었지만 준비했던 자료 내용을 기억하면서 차분하게 중계했고, 오히려 현장감을 높이기 위해 기지를 발휘했다고 한다. 관 뚜껑을 덮는 흙덩이 소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땅에 엎드린 채 마이크를 묘혈 가까이 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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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UNC는 미군이 한국전쟁 중에 한반도를 대상으로 심리전을 전개하는 데 활용한 방송국이었다. 유엔군사령부는 전쟁 중에 KBS를 지휘 통제하고,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 지원했으며, 방송 시설과 기자재도 지원했다. 50년대 중반까지는 VUNC의 프로그램이 KBS를 통해 직접 중계되기도 했고, 아나운서와 작가 등도 일본에 가서 VUNC 방송 제작에 참여했다. 이 방송국은 휴전 후 18년 가까이 더 운영되다가 1971년 6월 30일에 방송을 종료했다.

위진록 선배는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에도 12년 동안 KBS 제2 라디오의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 ‘음악의 향연’을 진행했다고 한다. 선곡서부터 해설, 진행, 연출을 하며 현지에서 제작한 테이프를 보내는 방식이었다. 위 선배는 1949년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교향악단 연주를 중계방송한 것을 시작으로 라벨의 <볼레로> 한국 초연,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KBS교향악단, 지휘 자코비)을 해설 방송하는 등 클래식 음악 전담 아나운서로 활약한 바 있다.

방송에 대한 열정은 이곳 미국으로 오신 뒤에도 계속 이어진 거 같습니다.

“VUNC가 1971년 6월에 방송을 종료하고, 미국의 오키나와 영유권이 1972년 일본으로 반환되면서 저도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었죠. LA로 와서 처음에는 햄버거집과 식당을 운영했습니다. 한 10년 정도 하다가 서점도 운영했고, 타운 신문인 월간 <코리안 뉴스>의 발행인이 돼서 미주 동포사회의 각종 뉴스와 생활 정보를 전해주는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마이크는 놓지 않았습니다. 이민 생활 초기에는 LA 한국일보사가 운영하던 방송국에서 매일 방송했고, 몇 년 전까지도 LA 라디오 코리아의 아침 프로그램 <일요응접실> 진행을 맡아서 6년 동안 방송했습니다. 또 1979년으로 기억되는데, KBS의 라디오 프로그램 <오후의 교차로>에서 이민 생활의 애환을 주제로 방송하기도 했지요. 제 수필집인 『하이! 미스터 위』를 한 달 동안 연속 낭독하는 형식으로 방송한 겁니다. 한국을 떠나서도 역시 ‘방송은 내 삶이고 내 인생’이었습니다.”

위진록 선배는 일본에서 22년 동안, 미국에서 51년 동안 방송을 하는 동안에 방송 작가, 클래식 음악평론가, 칼럼리스트, 수필가로서의 다양한 형태의 일도 하면서 그 삶의 궤적을 여러 권의 에세이와 평전을 통해 꾸준히 정리했다. 『하이! 미스터 위』(1979), 『이민 10년생』(1984), 『잃어버린 노래』(1993), 『낙타의 속눈썹』(1997), 『위진록의 커먼센스』(1999), 『5분 인물전』(2004), 『클래식, 내 마음의 발전소』(2011), 『고향이 어디십니까?』(2013), 『오래된 출장』(2020) 등이 그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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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사이공(호찌민)에서 고 채명신 장군과

오래 전에 작고하셨지만 사모님도 아나운서였지요?

“네, 최창숙 아나운섭니다. 전쟁 중인 1952년에 저하고 결혼했습니다. 아나운서는 저보다 2년 뒤인 1949년에 서울 중앙방송국 아나운서 모집에 응모해서 황순덕과 함께 합격했지요. 1·4 후퇴 때에는 KBS 부산방송국에서 임택근, 이수열, 정순향 아나운서와 같이 방송을 했고, 1956년에 시작됐던 우리나라 최초의 TV 방송 HLKZ 여자 아나운서로도 근무했습니다. 1958년부터는 VUNC에서 아나운서로 근무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KBS 아나운서실에 있는 역대 아나운서 명단에 최창숙 아나운서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어서 좀 서운했습니다.”

위진록 선배의 부인 최창숙 아나운서는 1992년 암으로 고생하다 세상을 떠났다. 장남은 예일대와 하버드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 일을 하다 적성에 맞는 초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으며, 딸도 하버드 대학과 UC버클리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 생활을 하다 자녀 교육을 위해 전업 주부로 있다. 막내 아들은 UC샌디에이고 대학원을 졸업하고 의료 기관에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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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출판기념회. 왼쪽부타 박종세,강창선,위진록,장기범,임택근,황우겸,이수열 아나운서

방송 생활 76년을 하신 아나운서 대선배로서 후배들에게 한말씀 해 주시지요

“방송하는 사람은 정열을 태운다는 마음, 그리고 이게 내 천직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 해야 돼요. 나이가 들면 성대가 달라져요. 저도 예전엔 목소리가 좋았었어요. 그러니까 할 수 있을 때 전심전력을 다해야지요. 보통 하는 말이지만 이게 참 중요한 거 같아요. 그리고 듣는 사람을 위한 방송이어야지요. 자칫 방송하는 사람을 위한 방송이라고 착각할 수가 있어요. 요즘 자기 자신이나 자기의 명성을 위해서 방송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 같아요. 듣는 사람이 있다는 거, 듣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방송하는 아나운서가 되면 좋겠어요.”

국내외 최고령 원로 아나운서는 여전히 정열적인 방송을 하듯이 말씀하셨다. 그동안 선배님의 자서전인 『고향이 어디십니까?』와 각종 미디어를 통해서 6·25 발발 제1보 방송 등의 내용을 보고 들었던 아나운서 후배로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경험한 76년 방송 인생의 발자취를 육성으로 직접 들으니 더 감동적이었다. 아나운서클럽 웹진에 기록된 선배님의 육성 증언이 클럽 회원과 후배 아나운서 여러분에게도 잘 전달되길 바란다.

대담: 정영호(전 KBS), 정리: 김성길(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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