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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인터뷰

만나고 싶었습니다

프로필

 

KBS 아나운서(1963)

MBC 아나운서 실장

MBC예술단 대표이사

15,16,18대 국회의원

자유선진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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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키워준 고향에 왔습니다. 허허허”

변웅전(전 MBC) 아나운서

아나운서클럽에서는 평소 뵙고 싶었던 선배님들의 육성 인터뷰를 영상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우리나라 방송사史의 한 축을 담당했던 아나운서 조직의 전통과 우리말 발전을 위한 시대적 사명을 이어가고자 한다. 인터뷰는 영상과 텍스트로 각각 정리해 웹진을 통해 공유하고 클럽 아카이브로 보존할 계획이다. 선후배 회원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조언과 참여를 기대한다. 시리즈의 첫 회에는 70∼80 년대 우리나라 방송계에서 큰 역할을 했고, 국회 3선 의원으로서 정치 발전에도 뚜렷한 족적을 남긴 변웅전(전 MBC) 선배 아나운서와의 인터뷰 내용을 게재했다. 인터뷰는 광진구 자양동에 있는 더클래식500의 도서실에서 유지현 편집위원이 진행했다.

안녕하세요? 어렸을 때 화면에서 뵙던 모습 그대로 변함이 없으신데, 건강을 유지하시는 특별한 비결이 있는지요?

 “특별한 비법은 없고요. 아침저녁으로 좀 걷고 있는데 하루에 만 보는 꼭 채웁니다. 제가 원래 시골 출신입니다. 학교를 오가는데 한 4Km를 걸어야 했습니다. 거기를 매일 걸어서 다녔던 게 지금까지 습관이 됐습니다. 걷는 것이 건강에는 제일 좋지 않나 생각합니다.

 

궁금한 게 많지만 우선 방송에 관한 것부터 여쭤 보겠습니다. 1963년에 KBS에서 아나운서 생활을 시작하셨는데 아나운서를 지망한 특별한 동기가 있었는지요?

 ”제 고향이 충청도 서산입니다. 충청도가 우리나라에서 말이 제일 느리고 점잖지요. 말이 느리니까 ‘아버지 돌 굴러유∼’ 하다 보면 돌이 먼저 굴러와 다치겠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지요. 그래서 중학교 때, 서산 사람도 말을 좀 빨리하고 중계방송도 하고 뉴스도 하는 아나운서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중학교 때요? 당시에는 방송 진출을 생각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더구나 서∼산에서.

 “꿈만 막연하게 가진 거지요. 그렇지만 그때부터 신문을 읽기 시작했죠. 그때는 사투리가 뭔지 표준어가 뭔지 몰랐지요. 서울을 와 봤었어야지요. 다행히 외삼촌이 릴 녹음기를 선물해 줘서 테이프가 헤질 정도로 연습을 했습니다. 고등학교까지 서산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사투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대학교(중앙대)에 들어간 뒤에는 방학 때도 고향에 가지 않았습니다. 서울말을 익히느라고. 그렇게 준비를 해서 대학교 2학년 때 KBS 아나운서 시험을 봤는데 보기 좋게 낙방을 했고, 재수 끝에 3학년 때 합격을 했지요. 그래도 초등학교에 일찍 들어 갔고, 군대 생활도 00 군번으로 짧게 해서 아나운서 출발을 일찍 한 셈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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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대망의 KBS에 입사하셨네요?

 ”1963년도에 총 21명이 뽑혔는데, 신문에 명단이 크게 났습니다. 합격한 아나운서의 지역에서는 현수막도 붙었고요. 서울에는 저하고 소병규, 이승상 이렇게 세 명이 남고 다른 동료들은 전국으로 배치 받았지요. KBS는 아나운서로서 제 고향이자 또 말을 배운 본고장입니다. 거기서 이규항 선배로부터 말뿐만 아니라 철학도 많이 배우고 술도 많이 마셨습니다. 기본적인 교육을 받고 겨우 걸음마를 시작한 시기였지요.

 

그런데 1969년도에 MBC로 옮기셨어요

 MBC가 정동에서 TV를 개국하는 시점에 옮겼지요. KBS에 계셨던 임택근 선배님과 최세훈, 최정연 선배님이 후배들을 불렀어요. 친정인 KBS에서 시댁인 MBC로 갔는데, 다행히 KBS 출신 시누이 여러분이 아주 따뜻하게 대해 주셨어요. 아나운서의 ‘아’자도 모르던 제가 친정에서 받은 훈련 덕분에, 그리고 따뜻한 선배들 덕분에 MBC에서 꽃을 피울 수 있었지요.

 

처음의 뿌리를 잊으면 안된다는 말씀, 잘 새기겠습니다. 변웅전 선배님 하면 오랫동안 진행했던 이 프로그램이 먼저 떠오르는데요. 당시의 오프닝을 한 번 해주시겠습니까? 

“한번 하지요 뭐. ‘인기와...’(버벅) 아, 안되는데요. 하하하∼. 다시, ‘인기인의 오락실, 유쾌한 청백전! 허허허허”

MBC TV 개국 프로그램이었는데, 20년 가까이 하셨지요?

“<유쾌한 청백전>은 1969년 11월에 시작했는데, 인기 연예인들이 나와서 다양한 경기를 펼치는 포맷이었지요. 우리나라 스포츠를 예능에 접목한 첫 프로그램일 겁니다. 큰 인기를 끌어서 당시 모든 방송국의 장르 불문하고 시청률 1위를 기록했습니다. 매주 일요일 아침 정동 MBC 스튜디오에서 방송했는데, 방청객들이 덕수궁 앞에까지 줄을 설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뤘어요. 대단한 인기였지요. 그런데 안전사고가 났어요.

 

그래서 녹화 장소를 MBC 옆에 있는 ‘김일 체육관(후에 문화체육관)’으로 옮기고 포맷도 스포츠를 좀 더 강조한 활동적인 내용으로 바꿨습니다. 타이틀도 <굳센 체력, 슬기로운 마음. 명랑운동회>로 바꾸고, 스케일도 크게 해서 연예인뿐 아니라 일반인, 체육인들도 참여하는 대형 프로그램으로 이어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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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청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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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님의 트레이드마크인 넉넉한 웃음이 기억나는데요. 에피소드도 많았을 것 같아요. 

“<유쾌한 청백전> 할 때인데 여동생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요. 그런데 그 프로그램은 저의 너털웃음이 프로그램 속에 섞여야 돼요. 동생을 여윈 상태에서 ‘허허허’ 하면서 힘들게 진행해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명랑운동회>는 워낙 인기가 있다 보니까 지방 MBC의 큰 체육관을 찾아가며 방송을 했어요. 그런데 그때마다 꼭 사고가 났어요. 방청객이 인산인해를 이루니까 유리창이 깨지고, 넘어지고 했지요. 사랑을 많이 받았던 프로그램입니다.”

 

오랜 기간 방송하시면서 남다른 나만의 신념이 있었는지요?

“저는 큰 복을 타고난 것 같아요. 다 그렇게 아껴줬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했습니다. 방송하면서 프로그램에 대한 사랑과 열정은 누구보다 강렬했던 것 같습니다. 어떤 프로그램이든지 제작자들보다 한 번 더 생각하고, 준비하고, 노력했습니다.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기획 의도와 연출을 생각하고, 카메라 앵글을 의식하고, 연사 섭외력도 갖춰야 합니다. 물론 밤잠 안 자는 노력과 희생정신이 필요하지요. 그렇게 되면 연출자와 제작 스텝, 진행자가 혼연일체가 되고 프로그램에 녹아들어서 좋은 결과가 나오게 되지요.

*MBC 10대 가요제

그 신념과 열정을 쏟은 결과가 인기의 비결이었네요.

 

“제가 MBC에 갔을 때가 코미디언 전성기가 시작된 시기였어요. 1975년 무렵까지였는데, 거의 모든 프로그램을 코미디언들이 진행하고 있었어요. 곽규석, 곽규호, 구봉서, 배삼룡, 이기동 씨가 대표적이었지요. 그런데 제가 그 프로그램 하나하나를 맡기 시작했지요. <금주의 인기 가요>를 비롯해서 <10대 가수 가요제> 같은 프로그램들이었지요. 요즘도 많은 프로그램을 보면 상당 부분 개그맨들이 진행하는데, 아나운서들 정열을 다시 찾아야 돼요. 선배로서 책임도 느끼고 아쉬움도 많이 남습니다. 특히 KBS의 <전국노래자랑>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속상하지요. 세월이 흘렀고, 방송 환경도 바뀌었지만 아나운서들이 해야 할 것은 해야지요. 요즘 진행자들이 자고저字高低를 따집니까, 장단음長短音을 지킵니까, 말을 정확하게 하는 사람들이 프로그램을 맡아야지요.”

 

아나운서에서 국회의원으로 나가신 게 선배님이 처음이신데요. 그 변화의 과정이 어렵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1996년에, 그러니까 33년 이상을 방송국에 있다가 정치에 입문했는데, 아주 힘이 들었지요. 고 김종필 총재께서 젊은이와 호흡할 수 있는 정치인이 필요하다고 해서 갔는데, 역시 유권자들과의 소통이 큰 과제였습니다. 그렇지만 아나운서하고 정치인의 공통점이 말로 하는 직업이라고 본다면 '정직한 사람은 통할 것이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유세할 때 주로 한 말이 ‘아나운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물론 저도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일기예보 때(웃음).’ 였습니다. 유권자들이 좋게 봐주셔서 충남 최다 득표를 얻으면서 시작 했지요. 꾸미지 않고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니까 마음과 마음이 통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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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세하는 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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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종필 총재와 함께

“아나운서로서 국회의원에 처음으로 출마하셨던 분이 임택근 선배님이셨어요. 서울 서대문에서 나오셨는데, 그때 제가 응원하러 갔었습니다. 상대방 후보가 민주당의 중진 의원이었어요. 말씀을 아주 잘하시더라고요. 임 선배님이 유세를 잘하시고 내려온 다음에 그분이 단상에 오르시더니 ‘임택근 후보는 1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명 아나운섭니다. 명 아나운서는 방송국으로, 나는 국회로 보내주십시오.’ 그 한마디로 끝나더라고요.”

정치인으로서 꼭 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는지요? 

“국회의사당에서 연설할 때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역대 대통령 후보와 역대 당 대표의 장점을 전부 쭉 부각해서 연설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의사당 내에서는 박수를 치지 않는 전통이 있었는데 제가 박수를 많이 받았지요. 후배 정치인들에게 꼭 부탁하고 싶은 것은 상대 당을 칭찬하는 풍토를 좀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야당은 현 정부의 잘못된 정책은 비판하되 잘한 것은 잘했다고 칭찬도 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DJP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나운서는 순발력이 있지 않습니까? 당시에 DJ(김대중)하고 JP(김종필)가 서로 힘을 합쳐야 되는 정치 상황이었는데, 이니셜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의논하는 자리에서 제가 즉석에서 ‘DJP!’하고 제안했습니다. 아나운서 경험에서 나온 발상이었지요. 지금까지도 통용되는 키워드가 됐습니다.

 

아나운서와 정치인 중 어느 것이 더 힘드셨어요? 

”아나운서가 제일 힘들었고요. 정치는 더 힘들었습니다. 허허허. 물론 정치에 관심있는 후배들이 정계에 나오면 꼭 성공합니다. 정직한 말을 정확하게, 그리고 가슴으로 호소하기 때문에 큰 정치인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고생스러워요. 그래서 방송으로 마쳤으면 하는 것이 아나운서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솔직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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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본회 연설

*고 김대중 대통령 만찬 모임

만약에 방송인도 아니고, 정치인도 아니었다면 어떤 일을 하고 계셨을까 궁금합니다. 

“저는 어려서 큰 방앗간을 하고 싶었어요. 저희 선친이 정미소 주인이셨어요. 그래서 저는 좀 더 규모가 큰 정미소, 정부미를 찧는 정미소 주인이 되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좀 다른 얘깁니다만 제가 국회의원 출마했을 때 충남에서 최다 득표로 당선된 것은 어머니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집에 큰 창고가 둘 있었는데, 6·25전쟁 때 피난민들이 내려왔는데, 그 분들이 가족별로 살 수 있게 화덕하고 돗자리를 준비해 주었어요. 몇십 가구가 거기서 사셨는데, 저희 어머니가 쌀독의 쌀을 다 퍼다 주셨다고 해요. 그 고생하신 분들이 세월이 흘러 서산의 상권을 잡았고, 그분들이 표를 많이 모아 주셨지요.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의 모습은 어떠셨나요? 

“아주 인기 없는 아빠고 남편이었습니다. 매주 일요일에 녹화를 했어요. 일요일에 출근하는 아빠가 무슨 인기가 있었겠어요. 요즘도 인기가 없어요. 저희가 강아지를 키우는데 제 방에 와서는 소변만 보고 갑니다. 허허허.”

 

최근에 아나운서클럽 모임도 참석해서 격려해 주시고, 단톡방에도 좋은 말씀을 자주 올려 주셔서 국내외 많은 분들이 반가워 하십니다.

고향에 온 것이지요 국회에서 한 25년 있다가 이곳에 와서 옛날 선후배를 만나니까 좋아요. 전임 회장님들이 클럽을 위해 오랫동안 수고해 주셨고, 현 이계진 회장께서 클럽을 사랑방 같은 느낌으로 만들어 주시고 또 시래기국을 나눠 먹는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니까 선후배 간의 정이 더 돈독해지는 거 같습니다. 정말 친정과 고향에 온 것 같은 기분입니다. 우리 클럽의 가장 큰 장점은 선배를 존경하고 후배를 사랑하는, 그러면서 선후배 관계가 확실한 모임입니다. 이런 모임이 또 있을까요?”

 

클럽 발전을 위해서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는지요?

“제 고향은 둘이 있어요. 저를 낳아준 고향이 있고, 저를 키워 준 아나운서실이 있습니다. 그 아나운서 후배들한테 '미력이나마 뭔가 꼭 남기고 싶다'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선배로서 뭔가를 바라기보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하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감기 기운이 있어서 목소리가 조금 불편했는데, 잘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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