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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인터뷰

만나고 싶었습니다

“훌륭한 사회 사업가들이 많이 나타나서 장애인들이나

어려운 사람들이 더 행복한 삶을 살면 좋겠어요”

​성선경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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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경 사회복지법인 ‘동천학원’ 이사장을 유지현 편집위원이 만났다. 동천학원은 지적 장애 학생들에게 유·초·중·고·직업과정의 특수교육 서비스를 하는 특수 교육 기관이다. 성 이사장은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과 졸업하고 KBS와 DBS 아나운서를 지냈으며, 한국스페셜올림픽위원회 고문으로 지적 장애인 복지 증진에 기여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여기 오는 길에 선배님의 그 따뜻한 미소가 자꾸 떠올려지는 거 예요.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신나게 달려왔어요. 저도 네팔과 히말라야 사람들을 돕는 NGO 나마스떼 코리아 이사장으로 봉사를 조금 하고 있어서 많이 배우는 시간도 되고 또 공감하는 시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벅찬 마음이에요. 요즘 하시는 일은 어떠신지요?

 “멀리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사회의 곳곳에 우리 손이 필요하다는 분들이 많이 계신데, 정부에서도 많이 도와주시고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혀서 이곳에서 생활하는  분들이 참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울한 애들이라는 선입관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는 것이 제 희망이거든요. 그래서 항상 즐거운 프로그램을 통해서 더 재미있게 생활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여행도 많이 하고 있고."

 

선배님이 지금 ‘동천 세상’에 계시지만, 방송 초창기 여자 아나운서로 시작하셨으니까 아나운서 얘기부터 시작하면 어떨까요?

 ”아나운서 시절은... 그때 여자 여덟, 남자 한 명 아나운서들이 KBS 공개 모집에 합격해서 그냥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방송하면서 평범하게 산 삶이었고요. 그러다가 거기서 남편을 만나 결혼했지요. (편집자 주: 성선경 운영위원은 1962년 KBS에 입사한 후, 이병열 아나운서와 결혼했다. 1965년 DBS 개국과 함께 자리를 옮겨 활동하다 1974년에 퇴직했다. 남편 이병열 아나운서는 2021년에 별세했다.) 당시에 시어머님이 영아원 복지 사업을 하고 계셨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합류하게 됐고, 두 분이 다 돌아가시면서 제가 맡아 여기까지 오게 된 거예요.

 

처음에 비장애 아이들을 입양시키고 나니까 발달 장애 어린애들만 남았어요. 다섯 살, 여섯 살. 그러니까 유치원 갈 나이죠. 그런 아이들을 돌보다가 성장하니까 교육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유치원 졸업하고 나면, 국민학교 보내야 하고, 이후엔 중학교 가야 하니까 그 절차에 따라서 직업 학교까지 설립하게 됐죠. 그런데 이곳에 있는 아이들만 가지고는 인원충당이 안 되었는데, 가정에 있는 아이들도 학교 갈 데가 없었기 때문에 부모 있는 아이들도 몰려오더라고요."

 

지금은 전국적으로 오고 싶어 하는 학교일 것 같아요.

 

 “네. 아이들을 많이 데리고 와서 입학생이 늘고, 학생 수가 많아졌지요. 감당을 못할 정도로 늘어서 정식 학교로 설립했습니다. 학교 건물도 저희가 지었어요. 처음에는 강남에 가지고 있던 조그만 땅에서 시작했는데 그 땅 주위가 다 시유지라 그때 그 땅을 팔고 이곳 월계동으로 이사 왔어요. 그쪽 땅이 비싸니까 그 돈을 팔아서 여기 땅 다 사고 학교도 짓고, 집과 체육관도 짓고, 이 건물들을 다 우리 법인 자금으로 지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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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노원구 하계동에 있는 ‘서울동천학교’ 전경

학교에 학생 수가 상당히 많고 연령대도 다양하네요.

 

 “네. 현재 250명 정도인데, 유·초·중·고등학교, 그리고 2~3년간 직업 학교까지 이어져요. 그런데, 학교 졸업한 후가 또 문제가 되더라고요. 직업 교육 후 취직하고 돈 벌고 그러다 보면 나이가 20살이 넘어요. 여기도 나이 제한이 있어서 일정 나이가 되면 여기 시설에 못 있고 독립해야 됩니다. 그런데 직업을 가진 애들은 생활을 해야 하잖아요. 저희 동천재단에서 가지고 있는 원룸, 투룸 아파트가 한 15채 있습니다. 분양받아서 샀는데, 그룹 홈으로 한 집에 서너 명이 들어가서 직장 다니며 독립생활하다가, 좋은 사람 만나면 결혼도 하고, 다들 잘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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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학원 설립 정신인 ‘사랑으로 돌봄’을 실천하며 학생들이 보람을 느끼도록 다양한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 홈페이지 캡처

동천의 어머니

 

‘동천’, 그 이름에 어떤 뜻이 담겨 있나요?

 “‘동천’은 설립 당시 이사장님 호예요. 중구 충현동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그전에는 충현이었고, 여기 와서 이사장님 호를 따서 ‘동천’으로 변경했습니다. 동쪽에서 흐르는 물같이 항상 행복하고 깨끗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동산이 되기를 원해서 동천이라고 지었습니다."

 

꿈동산이네요. 동천 꿈동산. 지적 장애를 가진 학생들이라 처음에는 그 길이 쉽지는 않으셨을 것 같아요.

 ”네. 요즘은 전문가를 많이 뽑아 그분들 덕을 많이 봐요. 대학에서 지적 장애 특수교육과를 졸업하고 시험을 통과해야 선생님이 되는데, 특수교육과 자격증을 가진 전문가들, 그리고 이 분야에서 은퇴한 분들이요. 그리고, 교육을 많이 시킵니다. 오늘 아침에도 인권 교육이라고 해서 직원들 한 오십 명이 교육했는데, 선생님들 교육을 철저히 해서 다 전문가예요."

 

네. 제가 오늘 학교에 들어오면서 한 선생님이 나이 든 학생 도와주는 모습을 옆에서 봤는데, 진심 어린 마음으로 함께 해주는 모습이 참 감동적이었어요.

 “감사합니다. 저희는 직원이나 선생님을 뽑을 때 첫째 조건이 똑똑한 게 아니고 정말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 푸근하게 아이들을 품어줄 수 있는 사람이 우선순위에요. 그래서 선생님들이 정성을 다해 사랑으로 키우고 있다고 생각해요."

처음에 맡으셨을 때는 꽤 힘드셨을 거 같아요. 자녀분들도 있었고.

 

 “그렇죠. 그때는 귀찮기만 하고, 슬프기만 하고, 내 팔자야~ 하고. 애들 볼 시간도 없고, 맨날 바빠서 쩔쩔 매고, 정말이지 힘든 생활 했어요. 포기하고 싶었죠. 그런데 포기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리고 또 제가 성격상 남의 어렵고 힘든 걸 좀 못 보고. 마음이 약해요. 그래서, 손을 못 놓고 질질 끌려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했는데, 나이 먹으면서 보람을 느끼고, ‘정말 이거 해야 하는 일이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직원들이 너무 일들을 잘하니까 재미도 있어요. 애들이 변해가는 모습이 감동적이고 그래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한국 스페셜 올림픽의 리더

 

대외적으로도 봉사를 많이 하시던데요?

 “이 일 시작한 후에 제가 특수교육과 대학원을 다녔고, 학문적으로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특수교육에 대한 여러 가지 강의와 세미나도 많이 참석하고. 스페셜 올림픽 (편집자 주: 지적 장애인과 자폐성 장애인이 참가하는 국제 스포츠 대회)을 통해 외국에 갈 기회도 있었고 많이 배웠지요. 제가 한국스페셜올림픽위원회 고문으로 있는데, 그 단체를 거의 창립 하다시피 하면서 열심히 일했어요. 마침 6월 14일부터 강원도에서 40개 국이 참여하는 국제 행사를 하는데, 저도 초대받아서 가려고 해요.(편집자 주: 인터뷰는 5월 27일에 진행)"

 

2003년 아일랜드 스페셜올림픽에 가셨지요?

 ”네. 많은 아이들을 데리고 갔었습니다. 장애인 교육환경을 직접 보고 사람들 만나면서 많이 배웠지요. 그때에는 우리나라가 발달 장애인들한테 관심이 없어서 부러운 나라들이 많았어요. 장애인들이 먹고 사는 문제에 걱정 없고, 돌봐주는 선생님들도 나라에서 다 지원해 주더군요. 그런데 학교에 걸어 다니는 애들이 안 보이는 거예요. 침대에 누워서 이동하는 애들만 있고. 웬만한 애들은 다 일반 학교의 특수 학급에서 소화한대요. 그런 걸 보니까 너무 부럽더라고요. 그래서 우리는 언제 저렇게 할 수 있나 부러워했는데, 지금은 우리나라 제도도 잘 돼 있는 것 같아요. 이제는 오히려 그쪽에서 우리를 부러워하는 것도 많아요. 우리 학교에도 견학을 많이 옵니다. 가까운 일본, 뉴질랜드 이런 나라와는 교환 학생뿐 아니라 교원, 직원들끼리도 교환 근무를 해요. 스페셜올림픽을 통한 국제 교류이지요."

 

첫 출전에 우여곡절이 많았을 것 같아요.

 “네. 처음에는 사실 동천 선수들뿐이었죠. 그때 지도 선생님을 비용을 들여 모실 수는 없으니까 자원봉사를 하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김연아 선수도 봉사했습니다. 김연아 사진이 저기 걸려 있잖아요. 우리 빙상장 개관했을 때 여기 와서 한 1년 동안 연습했어요. 우리 아이들 좀 가르쳐 주고, 2013년에 우리나라에서 스페셜동계올림픽을 할 때는 김연아 선수가 우리 아이들 데리고 스케이트를 탔어요. 그런 아름다운 추억들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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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평창 동계 스페셜올림픽 김연아 선수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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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재활체육센터 지하에 있는 아이스링크장. 원래 장애인 재활 치료를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나 일반인도 다양한 빙상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우리나라에 빙상 경기장 시설이 매우 열악할 때 이렇게 훌륭한 빙상장을 지었네요. 사회적으로 굉장히 큰 길을 열어주셨다고도 생각할 수 있겠어요.

 “그렇게까지 생각한 건 아니고, 그냥 우리 아이들 어떻게 하면 스케이트를 좀 태울 수 있을까? 장애인 스케이트 선수들을 기를 수 있다면 좋겠다는 단순한 그런 생각으로 작게 지으려고 생각했는데, 우리 아이들이 작은 데서는 아이스하키도 할 수 없고, 뭘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까 이왕 지으려면 국제 규격으로 잘 건립하자고 갑자기 계획이 커져 국제 규모로 짓게 되니까 돈이 얼마나 많이 들었겠어요?"

 

그러게요. 어떻게 감당하셨어요?

 ”정부에서 한 3분의 1일 정도의 도움을 받고, 나중에 또 좀 더 도움을 받고, 반 이상을 법인에서 땅 팔고 좀 남았던 돈으로 충당하고, 그러고도 부족해 빚도 지고, 이사장님 땅 저당 잡혀서 10억 얻고, 고생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스케이트장을 국제 규모로 정말 잘 지었죠. 장애인 선수들도 연습하고, 일반 초등학교 아이들도 피겨는 말할 것도 없고, 스케이트 타느라 꽉 차요. 일반 아이스하키 선수들도 여기 밤 12시, 한 시에도 와서 연습해요. 여기 동천 학교 아이들은 스케이트 못하는 아이는 없어요. 다 타요."

 

작년 세계잼보리대회 때 체코 학생들에게 여기서 빙상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셨지요?

 “서울에 온 애들을 분산해서 각 구에 몇십 명씩 맡겼는데, 노원구청으로 그때 200 명이 넘게 배정됐나 봐요. 그래서 숙소를 마련하고 맞이했는데 스케이트 타러 와도 되냐고 해서 빙상장을 제공했고, 그때 학생들이 와서 스케이트 신고 이틀 동안 재미있게 놀다 갔어요."

말씀 들으면서, 교육가로서 얼마나 학생들한테 애정을 갖고 하시는지 느낄 수가 있습니다.

 “애정이 생겨요.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하나씩 하나씩 개선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면 그거에 대한 보람이 크더라고요. 지금도 탁아소 비슷한 일, 직업 재활 시설, 직업학교, 그리고 애들 임시 보호소, 낮에 잠깐 봐주는 거, 시간제로 봐주는 거 등등, 뭐 그런 사업을 안 할 수가 없어요. 하는 사업 종류가 한 열 가지는 될 거예요."

사업가로도 성공

 

‘동천 모자’. 어떻게 그런 사업까지 시작하셨어요?

 “직업교육에 재봉틀 교육이 있었어요. 그런데 재봉틀 같은 건 다치기 쉽잖아요. 그래서 웬만큼 지능이 있는 여학생들에게 재봉틀 교육을 시켰더니, 아주 잘해요. 그 아이들을 놀릴 수는 없고, 수익성 없는 걸로는 아이들에게 도움도 못 주겠고, 그래서 쿠션 같은 걸 했죠. 그러다가 어떻게 우연히 제가 모자 공장을 한번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우리 애들이 다 할 수 있는 공정들이겠더라고요. 그래서 ‘모자 공장을 해야겠다.’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시작한 것이 오늘의 ‘동천 모자’입니다.

 

모자 공장해서 사기도 많이 당하고, 속기도 많이 속고, 돈도 많이 들어갔어요. 있는 돈 없는 돈 다 해서 공장을 차렸는데, 문을 닫을까 하다가 고급 모자를 한번 만들어 보자고 했죠. 아이들이 숙련공이 돼서 일은 잘하는데 부가가치가 없으니까 백화점에만 파는 고급 모자를 만들려고 뛰어들었어요. 그런데, 그게 적중한 거예요. 우리가 잘 만들어요. 아이들이 꼼꼼하니까. 한 달에 몇천 개 만들어야 해서 바빠요. 78개 회사가 여기에 모자를 맡기는데, 일류 모자 하는 집들이 다 와요. 하다 보니까 회사에 돈이 많이 쌓이게 돼서, 이번에 토너 카트리지 공장을 하나 또 차렸어요. 모자가 혹시 잘 안될까 봐 부수적으로 그걸 했는데, 그게 또 잘돼서, 지금 여기 말고 상가를 얻어서 공장을 하나 또 했어요."

 

그런 성공의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칭찬해주고, 기쁜 마음으로 일할 수 있게 도와주고, 즐거운 시간도 갖게 하고. 그런데 월급을 자꾸 올려주면 이게 무거운 짐이 되기 때문에, 월급은 나라에서 주는 기준을 맞춰서 우리가 조금 더 주고 나머지는 보너스나 여행 보내주거나 하면서 즐겁게 공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모자 만드는 직원들 중에 동천 학교 출신 장애 여성들이 3분의 2나 된다고 들었는데요?

 “네. 한 3분의 2가 장애인이고, 3분의 1은 정상적인 기술자들이 일하고 있어요. 장애인 여성들과 일반 주부들이 많고, 디자인이나 재단 같이 숙련된 기술은 정상인이 해야 해서 장애인 비장애인이 섞여서 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장애인들이 워낙 꼼꼼하게 하니까 속도가 느려서 적자 날 때가 더 많았는데, 한 6~7년 전부터는 적자는 안 나요. 속도가 빨라졌어요. 10년, 15년 똑같은 걸 하니까 그냥 손발이 잘 맞아 잘 돌아가서 잘 만듭니다."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일화가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그때가 이명박 대통령 때인가, 김대중 대통령도 전에 오셨었지요. 검사하는 일을 보통 장애인에게 시키는데, 그 아이들은 꼼꼼해서 잘못된 걸 용서 못 합니다. 대통령 모시고 시찰 중이었어요. 불량품으로 분류한 것을 대통령이 보시고 ‘아무 하자가 없는 것 같은데 왜 불량으로 내놓느냐’고 물으셨다가 야단맞았어요. ‘모르면 가만 있으라’라고.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그래서 그 모자에 어떤 하자가 있냐고 물었더니, 뒤에 조그만 실밥 하나가 늘어져서 그걸 떼기 위해 두었다는 거예요 ‘그 정도는 그냥 해도 되지 않냐’고 했다가 또 야단맞았어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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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품질에 불량률 제로로 통하는 '동천'은 장애인들도 세계 최고의 모자를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해 냈다고 한다. 서울문화투데이/여성신문 사진캡처

이 동천 기업의 경쟁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겠습니다.

 “장애인 아이들에게서 나와요. 그 꼼꼼함에. 그러니까 아무리 오래 만들고 똑같은 작업을 하는데도 싫증이 안 나는가 봐요. 그래서, 점점 숙련공이 되지요. 지금 공장장이 장애인이에요. 여기 와서 결혼하고 아들 하나가 지금 대학교 들어갔어요."

사회사업가의 정신

 

사회에 나간 뒤에 다시 또 찾아오는 학생들도 많이 있을 것 같아요.

 “저같이 선물 많이 받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화장품은 사 본 적이 없어요. 우리 애들이 월급 탄 돈으로, 또 이사장이라고 고급 화장품을 사다 줘요. 잠옷 같은 것도 사다 주고, 선물이 끝이 없어요. 뭐 어버이날이라고 그러면 이 방에 꽃이 가득해요. 꽃을 얼마나 사다주는지. 그래서 늘 꽃에 둘러싸여서 살고요. 뭐 맛있는 것 있으면 수시로 들고 다니면서 잡수시라고 놓고 가구요. 그래서 행복하게 잘 얻어먹고 있습니다."

 

자녀분들이 혹시 반대로 차별받는다고 불평은 없었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아이들에게 미안한 점이 많았지요. 내 아이들에게 100% 정성을 쏟지 못했지요. 그래도 여기 와서 일하는 애가 있어요. 피아노과를 나온 우리 애가 특수대학원을 들어가서 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음악 선생으로 한 10년 여기서 근무하다가 지금 교장하고 있습니다. 저를 도와주려고 애쓰죠. 나이가 있으니 제발 일을 더 이상 벌이지 말라는 충고도 끊임없이 하면서도 음으로 양으로 많이 도와줘요.

 

학교 운영이 아주 좋은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특수교육과를 전공하는 학생들도 꽤 많아요. 자격증을 많이 취득할 수 있도록 기회들을 많이 주는데, 일시보호소 보육사 자격증이나 사회복지시설 종사자 자격증 이런 것들을 따서 들어오게 되면 월급을 정상적으로 받게 돼요. 전문적인 영역으로 들어가서 아이들을 지도하기 때문에, 정말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아직 어려운 점이 있지요?

 “너무 심한 장애인들은 별도의 요양원이나 이런 게 있어야 하는데 우리 아이들하고 섞여서 살면서 본인도 고생이고 또 같이 사는 아이들이나 선생님도 힘들어요. 조금 더 세분화 해서 교육해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는데 그게 너무 돈이 많이 드는 일이라 어려워요. 정부에서 많이 생각하고 있지만 완전하게 되어가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아이들만 돌볼 수 있게 해주면 더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그다음에 나이 먹는 게 걱정이에요. 이제는 여기 아이들이 노년기에 들었어요, 20년, 30년 되다 보니까 쉰 살 먹은 사람들이 많아요. 이 일이 끝이 없어요. 그래서 일을 안 벌이려고 하는데도 여기까지 왔네요."

아나운서 시절..

 

국어국문학을 전공하셨어요. 문학소녀의 꿈도 좀 꾸셨을 것 같은데...

 

 “맞아요. 글 쓴다고, 국문과에 가서 학교신문 기자 생활도 하고, 글도 쓰면서, 그런 꿈이 있었죠. 그런데, 졸업하기 6개월 전에 KBS 아나운서 모집이 있었어요, 그때도 경쟁이 심했지요. 급히 친구 옷 빌려 입고 시험 보러 가서 인터뷰했는데,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여자 8명, 남자 1명 안에 제가 뽑히더라구요. 그래서 그때부터 아나운서 활동을 KBS에서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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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KBS중앙방송국 아나운서들과 함께. 뒷줄 왼쪽 두 번째가 성선경, 다섯 번째가 임택근, 그 옆이 박종세 아나운서

"행복했어요. 그때가 제일 좋았던 것 같아요. 짝꿍을 만난 것도 그렇고, 일도 그렇고. 당시 KBS의 텔레비전 방송이 처음 생길 때였어요. 그런데, 텔레비전 아나운서가 따로 없었어요. 우리 중에서 누가 나가야 하는 데 서로 안 나간다고 했어요. 화장도 해야 하고, 기다려야 되고, 얼마나 복잡해요. 그러니까 서로 안 한다고 그랬던 생각이 나고요. 텔레비전 시작할 때 어린이 방송 좀 맡아서 했어요. 그리고 인터뷰하는 것도 좀 하고. 그러다가 동아방송에 갔어요. KBS에 있다가 남편하고 좀 떨어져서 하고 싶은데 마침 전영우 선배님이 동아방송으로 불러주셔서 최귀영하고 둘이 갔어요. 김동건 아나운서도 거기서 만나서 친하게 지냈죠."

 

동아방송 개국 첫 멘트를 하셨죠?

 ”네. 제가 했어요. ‘여기는 동아방송입니다.’ 벌벌벌벌 떨면서 방송 시작했어요. 그때 동아일보 꼭대기 두 층에서 방송했는데, 방송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음악 방송 같은 아침 프로그램 하면 기자들이 구경한다고 방송 보러 모이고, 인기 절정이었죠. 그런 시간이 있었네요. 동아방송 가서 방송 많이 했어요.


그러다가 집안에서 복지 사업을 하고 있고, 제가 또 아기를 갖고 그러니까 도저히 겸해서 하기 어려워서 그만 두었죠. 지금처럼 이렇게 좋은 때인 줄 알았으면 안 그만두고 더 많이 했을걸... 임국희 아나운서는 같이 하다가 내가 그만두니까 “어이구, 나처럼 더 버티고 해야지. 그만두면 어떡하냐”라고 아쉬워했지요. 임국희 아나운서는 동아방송에는 같이 안 있었지만, KBS에 있을 때 참 친했죠."

 

그런데 KBS 시절에 인생의 반려자 이병열 선배님을 만나셨고요.

 “이병열 아나운서와 만난 것은 부모님들이 미리 어떻게 연이 되어 자연스럽게 사귀게 돼서 결혼까지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복지 사업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나보고 “이 일을 맡아서 계속하려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나는 못 하니 관두자”라고 선언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하겠다고 했어요. 그렇게 이 일을 떠맡게 된 거죠."

그래서 여기까지 오셨는데, ‘앞으로 꼭 해보고 싶다’ 이런 것이 있을까요?

 “있어요. 하루도 안 빠지고 저는 일기를 쓰는데, ‘동천’을 기억하는 책을 하나 만들고 싶어요. 직원들이 200명이 넘는데, 새로 들어오는 직원은 우리의 역사라든지 이런 것들을 잘 모르고 그냥 와서 일하니까 그런 것들을 알려줄 겸 ‘동천’이 지금까지 따뜻하게 운영해 온 정신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준비해서 작은 책을 하나 내려고 계획하고 있는데 잘 안되네요."

건강한 삶의 비결

 

실례지만 연세가 어떻게 되죠? 활력 넘쳐 보이시는 그 에너지가 어디서 나는 걸까요?

 “지금 여든여섯이거든요. 성격인 것 같아요. 제가 낙천적이에요.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잠 잘 자요. 희망이 힘인 것 같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여기까지 온 거로 생각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삽니다. ‘행복하다’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 사는 게 요즘 행복해요. 이제 그만 좀 손 놓고 내가 하고 싶은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는데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한 1~2년 더 하다가 손을 놓고 여행도 젊었을 때(?) 할 수 있다고 생각돼 가야겠고요.

 
저희 부모님들이 브라질로 이민 가셨다가 거기서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오랜 이민 생활을 동생들하고 했는데, 제가 어머니 아버지의 임종을 같이 못했어요. 그게 항상 마음에 걸려서 이번에 애들 다 데리고 브라질 갔다 왔어요. 브라질이 굉장히 멀어서 여행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거뜬히 갔다 왔습니다.

 
건강을 위해서 특별히 하는 건 없어요. 내가 조그마한 강아지 한 마리를 기르는데, 그 개가 나한테 많이 기쁨을 주고 매일 개하고 한 시간씩 걷는 것이 운동이에요. 그거 하고 있고, 그다음에 잠 잘 자요. 피곤해서 누우면 그냥 자요. 주로 한 6~7 시간씩, 푹~ 자고 일어나면 피곤이 풀리고, 음식도 가리는 거 없이 잘 먹고, 살이 쪄서 그런데 살 안 빼려고 해요. 그냥 무신경하게 먹고 싶은 대로 조금 덜 먹으면서, 아침이면 일어나서 기도하고, 공원 산책하고 그런 거지, 특별히 하는 건 없어요.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슬퍼서 울지 않아요. 그냥 기도하고, 금방 해결하고, 금방 원상 귀하고, 그런 식으로 살아요. 그래서 우리 직원들도 다 행복하고, 내가 높은 사람 노릇 안 합니다. 친구같이. 감사할 뿐입니다."

아나운서들에게 전하는 싶은 말..

 

후배 아나운서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 있으면 이 기회에 한 번 해주시죠.

 “너무 욕심부리지 말고, 아나운서도 너무 잘하려고 욕심부리고 그러지 말고 그냥 생긴 대로 자연스럽게, 감사하면서 하면 일이 더 잘 될 것 같아요. 내가 볼 때는요."

 

역시 ‘감사’가 키워드네요.

 ”그렇죠. 마음의 건강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그래야 병도 안 나지. 맨날 신경질 부리고 짜증 내고 그러면 그게 병이예요. 나는 그런 게 없어요. 그래서 항상 그냥 웃으면서, 애들이 아무리 잘못해도, 직원들이 잘못해도, 그럴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용서하고 같이 손잡고 그렇게 평화스럽게 살아가기 때문에 제가 건강한 것 같아요."

 

아나운서를 시작으로 다양한 경험을 하셨는데 ‘아나운서’ 첫 글자로 그 여정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즉석 시를 한번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제가 운을 띄어드릴까요?

 "아. 아껴 보려니 쓸모없어지고,
  나. 나중에 쓰려니 필요 없어지고,
  운. 운명을 기다리니 지쳐버리더라.
  서. 서로 같이 있을 때 아낌없이 사랑하며 살아가자."

오늘 선배님에게서 들은 말씀들과 함께 옆에서 느낄 수 있었던 따뜻한 여운이 오랫동안 남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해 나가실 일들도 지금까지 걸어오신 그 모습처럼, 사회에 아름다운 영향을 끼치리라 생각합니다.

 

 “저보다 더 훌륭하고 깊은 뜻을 가진 그런 사회 사업가들이 많이 나타나야죠. 그렇게 돼야 고생하는 장애인들이나 어려운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하고요. 또, 좋은 말씀 다시 한번 잘 새기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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