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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제공: Ilya Pavl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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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한민국의 아나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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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부심을 현재 진행형으로”

조석영

 

전 MBC아나운서
MBC 비서실장 역임
(사)청춘합창단 테너

아나운서클럽에 감사를

지금까지 살아온 내 생애의 10분의 1도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내가 공중파 방송사의 아나운서였다는 사실이 꿈결처럼 머나먼 추억 속으로 묻힐 뻔했으나, 매우 고맙게도 한국아나운서클럽의 눈부신 결속력 덕분에 우리 모두 그러하듯이 나 또한 나의 머나먼 이력에 대한 자부심을 현재진행형으로 지니게 됐다.


어렵사리 우리 클럽을 창설한 고 황우겸 대선배님께 깊이 감사를 드리며,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우리 클럽의 탄탄한 견인을 위해 애써주신 역대 회장님들과 운영진 그리고 현직 이계진 회장님과 함께 명콤비를 이뤄주시는 김규홍 위원장님께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나의 에너지 원천을 이루는 이 모든 자부심이 이 나라에 방송이 시작된 이후 이제까지 수많은 아나운서들이 기품있는 방송으로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듬뿍 받아온 덕분이니 이 또한 모든 선배님들과 후배님들께 깊이 감사를 드려야 할 일이다.

위협적이던 경쟁자들

1967년 여름의 MBC 공채 과정은 내게 필기시험도 긴장을 안겼지만, 정작 나를 더 크게 위축시켰던 것은 Voice Test 실기시험이었다. 시험장 밖으로 들려오는 경쟁자들의 어나운싱이 하나같이 너무도 멋지고 위협적이어서 도대체 나는 그동안 뭘 하고 있었나? 저들은 언제 저렇게 탄탄하게 준비를 하고 있었던가? 만감이 교차하며 걱정도 커졌다. 군복무를 마친지 채 3개월이 안 되던 시점이어서 취업 준비라고 해봤자 혼자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캐스터의 어투를 흉내내며 신문 기사를 낭독한 것이 전부였던 내게 경쟁자들의 뉴스 리딩이 얼마나 멋지고 화려하고 위협적이던지... 녹음기도 없던 시절 내 음성을 녹음해서 청취해 본 일도 전혀 없고, 심지어 마이크 앞에 단 한번도 서 본 일이 없는 완전한 초짜 무지랭이가 난생 처음 실기 전형장에서 마이크를 대면하는 느낌은 당혹과 위축 그 자체였는데... 참으로 놀랍게도, 마이크를 통해서 내 수험번호와 이름 석자를 밝히는 그 짧은 순간 시험장 실내를 휘돌아 다시 내 귀에 들리는 내 소리에 ' 내 목소리 바탕도 경쟁력이 있구나! '하는 갑작스런 깨달음이 화들짝 일었고, 그때 그 순간의 마력과 같은 자신감으로 내 뉴스리딩 실기는 내가 두려워하고 근심했던 것과는 판이하게 매우 여유롭게 치러졌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뉴스 리딩을 하는 그 긴박한 짧은 시간 동안 난생처음 마이크를 통해 확성되는 스스로의 목소리에 갑작스레 자신감을 갖게 된 절묘한 심경 전환은 구체적 설명이 쉽지 않다.

갑작스런 도전

기질 탓이겠으나 나의 살아온 발자취를 되돌아보면 나는 중요한 방향 설정 특히 직업 선택에서 다분히 즉흥적으로 대처해온 경향이 짙다. 삶이 반드시 계획된 대로 이뤄지지만은 않는다는 생각에서라기보다는 자신감의 부족에서 오는 무계획성과 망설임이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고 본다.


대학 재학 때에는 진로를 국어 교사로 잡았기에 졸업하며 교사 자격도 취득했고 학과 동기들 대다수도 국어국문과 교수가 되기 위해 대학원으로 진출하거나 고교 교사로 진출했으나, 막상 졸업을 하고 군복무를 마치기까지 내가 교사가 되겠다는 의지는 의외로 거의 없는 상태였다. 직업 선택의 기로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망설이며 방황하던 시기였다. 때마침 운명적이게도 MBC에서 신입사원 모집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었고, 그때까지도 막연하게 아나운서직을 동경만 했을뿐 내가 감히 도전해 보겠다는 엄두조차 못했던 입장에서 갑작스레 원서를 제출했던 것인데... 아슬아슬하게도 그 시점에 행운의 여신이 나를 건져준 것이었다.

아나운서가 된 기쁨

얼떨결에 미처 준비도 없이 맞닥뜨린 방송사 입사 시험에서 합격의 행운을 차지한 기쁨은 이루 표현하기 힘들 만큼 컸고, 나의 진로에 대해 걱정이 크셨던 부모님의 기쁨은 나의 기쁨보다 더 컸다. 형제자매를 비롯한 친지 모두의 축하도 기뻤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마음속으로부터 진하게 축하해 준 이는 나의 제대와 취직을 손꼽아 기다려왔던 지금은 아내가 된, 당시의 올드 미스 동갑내기 연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58학번인 우리 세대에는 스물여덟 살 여성은 혼기를 한참이나 놓쳐 가족의 큰 걱정거리로 여겨지던 때였으니 아마도 내 합격 소식은 단숨에 내 연인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을 듯하다.

뉴스리딩 학습에서 제일 두려웠던 선배 임택근님...

우리 입사 동기 아나운서는 김관영 정균 정영환 김채영 정영희 윤희자 등 모두 12명, 선배들은 우리를 MBC 재건 2기라 불렀다. 아마도 신설되는 민방인 탓에 여러 방송사로부터의 경력직 스카웃으로 진용을 갖추던 시기를 지나 우리 앞 기부터 공채로 신입사원을 선발했기에 우리 동기를 그렇게 호칭한 듯했다. 인사동 동일가구상회 건물 일부를 빌려 쓰던 최초의 사옥에 우리가 입사했을 당시 아나운서실장은 최세훈 선배님이셨고, 강영숙, 최정연, 오남렬, 이철원, 여인철, 김순환, 임국희, 이상세, 이청, 서유자, 황영화, 박명구, 홍선량님이 선배로 계셨고, 우리 기의 뒤를 이어 차인태 정연호 정희라 후배가 입사했다. 1969년 정동 신축 사옥으로 옮겨 TV방송을 시작하면서 동아방송에서 야구캐스터 최승일님, KBS로부터 변웅전, 김재영, 김용, 양승현, 원병희, 이승상님이 스카웃돼 오셨고, 이어서 정경수, 문무일님이 스카웃돼 오면서 새롭게 확창된 매체 FM과 TV방송에 투입되며, 전국 지방 계열사와 더불어 MBC 중흥 시대를 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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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제1회 아나운서 친선축구대회에 출전하며...

새내기 아나운서로서 기초 실기 교육을 받던 시절 특히 뉴스 리딩 시간에 가장 두려웠던 분이 고 임택근 상무셨다. 임 선배님의 지론은, 방송은 실수가 허용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니 교육 때부터 아예 한순간도 결점이 없는 리딩을 해 내야 한다는 것이었고, 예컨대 30초 길이의 뉴스를 읽어나가면 기어코 30초 끝날 때까지 단 한순간도 자고저나 쉼표나, 강조 포인트가 어긋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엄격한 방침 덕분에 우리 동기들은 임선배님의 교육 시간이 가장 두려웠고 "처음서부터 다시!" 라는 질책을 모면하고자 무던히도 진땀을 많이 흘렸다. 하여튼 거의 문장이 끝나갈 무렵에 단 한 곳을 주춤거려도 인정사정없이 "처음서부터 다시!"를 반복하시는 그 무자비(?)를 회피하기 위해 얼마나 많이도 긴장을 했던지... 그래도 그 시절이 많이 그립다.

5분 뉴스 데뷔의 감격

콜싸인을 거치고 시간 고지나 간단한 일기예보 또는 공지 사항이나 공익 캠페인으로 스테이션 브레이크를 메꾸는 단계를 지나 5분 뉴스에 데뷔하기까지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많은 국민이 나의 5분 뉴스를 청취하고 있을까? 수십만? 아니면 수백만?


그러나, 적막이 흐르는 아나운스 부스에서 시작 사인과 함께 뉴스를 출발하고, 남은 시간 30초, 남은 시간 15초 사인에 이어 이제 마치라는 사인과 함께 뉴스 리딩을 마치는 순간까지 내 머리속에는 청취자는 아예 없고, 오직 한 분 최세훈 실장님만이 가득하곤 했다. 이제는 고인이 되셨으나, 최세훈 실장님은 자상하고 인자하신 분이셨지만, 방송 품질 유지에 대한 열정과 기준은 매우 높고 엄격하셨다. 모든 후배 아나운서의 방송을 일일이 모니터링하셨고, 가급적 모두 녹음하며 당사자가 자신의 방송을 재생해 청취하며 스스로 결점을 깨닫고 바로잡도록 조용하게 이끄셨다. 내 방송에 하자가 없을 때에는 최 실장님의 "조석영씨 수고했어요. 녹음 들어 보세요."라는 미소가 반갑고 고마웠지만, 혹여 순조롭지 못하게 진행됐을 때에는 부끄럽고 죄송스러워서 최실장님 얼굴을 바로 뵙기가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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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8월 8일, MBC TV 개국 시절

생방송 실시간으로 내 목소리를 전국에 내보내는 5분 뉴스가 감개무량이었으나, 기자들의 전투적인 활약으로 뉴스가 취재되고 기사 송고와 데스크에서 팩트 체크 후 중요도에 따른 순서책정 등 편집 과정을 지나 아나운서의 최종 전달 수단을 거치는 보도 과정 전체 흐름을 이해하게 되면서부터는 뉴스를 전달하는 내 머리 속에는 내가 전하는 뉴스를 작성한 기자가 자신의 출입처에서 자신의 기사가 어떤 모습으로 방송될 것인지 귀 기울이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 계속 떠올랐고, 그러기에 그 기사를 애써 작성했던 기자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욱 또렷하고 깔끔하게 뉴스를 전달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자리 잡게 됐다.

모든 아나운서가 나의 스승이었다.

빙송 실전에 투입되면서 모든 채널의 프로그램을 더욱 많이 모니터링하게 됐다. 특히 각 방송사 아나운서들의 활약을 더욱 눈여겨 살피며 나의 부족함을 메꾸려 애썼으나, 스스로의 한계를 점점 크게 실감하게 됐다. 요즘 아나운서클럽 모임에서 당시 내게서 감탄을 이끌어 내며   영감을 줬던 여러 채널의 많은 스타 아나운서들을 직접 대면하면서 나 혼자만의 친근감을 느끼는 것도 적지 않은 보람이다. 그들 모두가 나와 경쟁자였고, 동업자(?)였으며, 또한 그들 모두가 나의 스승이기도 했다. 많은 세월이 흘러 다시 그들 동업자를 직접 만날 수 있고 인사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노인학교 붐을 일으킨 추억

1972년이었던가? <인생은 60부터>라는 노인 대상 라디오 프로그램이 새로 생겨나면서 이 프로그램의 전담 아나운서가 됐다. 3년여 동안 이 프로그램을 통해 노인들의 애환을 담고 건강을 격려하며 평생 학습의 소중함을 역설하면서 이 땅에 노인학교 붐을 일으킨 점은 보람으로 남는다. 우후죽순처럼 전국 교회와 성당에 노인학교가 생겨나고 평생교육의 필요성이 부각되면서 노인정의 역할을 획기적으로 대체하는 터전이 마련된 것도 국력이 부흥하는 시점과 궤를 같이한 덕분이라 풀이한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속으로나마 어렴풋이 많은 노인분들 삶의 현장을 대면하면서 나는 30대 초반부터 이미 나의 노년기를 마음 설계하게 됐다. 우선 건강을 지켜야 하고, 긍정 마인드를 일관성 있게 유지하며, 노년기에 이르러서도 가급적 일거리를 가지며, 부부가 공통의 취미를 갖자는 목표였고, 이제 8학년이 되어 문득 나를 되돌아보니 큰 굴곡 없이 대체로 이 목표를 향해서 꾸준히 내 나름의 길을 걸어온 흔적을 보게 된다.

일생 한 우물을 판 분들께 경의를..

1975년 말 여러모로 능력의 한계를 느껴 아나운서실을 떠나 관리직으로 옮기면서 일생 초지일관 아나운서로 활약하는 스타들에 대해 더욱 경외심이 일었고, 특히 유창한 스포츠캐스터가 많이도 부러웠다. 그 분야는 나의 도전을 원천적으로 허락하지 않았기에 나에게 진로 수정을 지시하는 신호탄이 됐다.

아직도 마이크에 미련을...

그렇게 아쉬운 마음으로 아나운서실을 떠나 다양한 관리직을 옮겨 다니며 방송직 이외에도 배워야 할 일이 또한 많음을 실감했고, 다양한 업무 경험을 쌓은 후 정년퇴직할 수 있었던 것에도 감사하고 있다. 또한 방송사 퇴직 이후 중간 5년여의 백수 계절을 제외하고 현재까지 계속 일거리를 가질 수 있음도 큰 행운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에 더해서 13년 전 KBS 예능 프로그램에서 우리 부부가 함께 시니어합창단 오디션에 합격한 것도 천운이라 믿고 있다. 당시에 전국의 지원자가 3,000여 명에 이르렀고 그 가운데에 우리 부부를 포함해서 40명만이 최종 선택됐으니 이건 아무리 봐도 보통 행운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기에 우리 부부는 현재까지 기꺼이 매우 충실한 ‘합창바보’로 살고 있다. 고맙게도 이 합창단에는 정해진 정년이 없으니 우리의 소리가 합창에 도움이 못 된다 생각될 때까지 은퇴를 미루리라 마음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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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사)청춘합창단 제5회 정기공연

어느덧 세월이 흘러 내 나이도 평균수명을 넘어서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이 나이가 되면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나도 전혀 놀라지 않을 일이지만, 그래도 내게는 마이크에 대한 향수가 아직도 남아 있다. 이 땅에 전쟁 포화가 멎은 후 TV가 생겨나기 전 국민들이 접근할 수 있는 방송미디어는 중파 라디오뿐이었다. 그 시절 내가 심취했던 프로그램이 배우 장민호(1924 - 2012)님이 낭독하는 KBS의 입체 낭독이었다. 혼자서 소설을 낭독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장민호님은 훌륭한 연극배우였기에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러 남녀노소의 대사를 워낙 실감나게 낭독해서 아주 감칠맛이 풍겼고, 그 청취하는 맛이 일품이었기에 나도 언젠가 그 배우처럼 감칠맛 나는 입체낭독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나운서 시절에는 그런 기회를 잡지 못했으니 이제 때가 되면 기어코 그런 기회를 가지리라 마음먹고 있다.


평생 전업주부로 살 것으로 믿었던 아내가 50대 중반에 성우학원를 다니더니 곧 이어 주부극단 배우로 10년, 이어서 68세와 70세에 당당하게 뮤지컬 배우로 등용되는 것을 보면서 긍정 마인드가 삶의 원천임을 실감한다.


7월 중순 뉴질랜드에서 열리는 국제합창제 경쟁 부문에 출전하기 위해 요즘 더욱 합창단의 소리를 섬세하게 다듬는 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2023년도에 두 차례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연달아 수상하며 최정상에 다다랐으니, 이젠 세계무대에서 우리 한국 시니어합창의 평가를 받아보고 싶어진 것이다. 지휘자와 함께 모든 단원들이 세계 무대에서 좋은 결실 거두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렇게 역동적인 합창단에서 부부가 함께 노래할 수 있는 것도 보통 행운은 아닐 것이기에 매일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침을 맞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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