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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제공: Ilya Pavl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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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티브 시니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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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미

 

전 SBS 아나운서
이화여대 사회복지대학원(노인학)
현 한국아나운서클럽 사무총장

내가 재미있게 사는 이유

“영미야 너 뭐 하니? 좀 보자.”
“아…. 미안. 이번 주 너무 바빠….”
“얘, 넌 정년퇴직했는데 뭐가 바빠?”


친구가 전화해서 볼멘소리로 묻는다. 그래, 난 노는 여자지. 정년까지 일했는데 왜 이리 분주한 거야? 엷은 미소가 입가에 스친다. 대부분 정년퇴직하면 한동안은 자유롭고 좋다가 이내 지루하고 무료하고 재미없는 일상이 도래한다고 선배들이 엄포를 놓았다. 그런데 난 매일 왜 이리 할 일이 많고 정신이 없는 거야?


원래 부지런한 삶을 좋아하지 않았다. 36년을 방송국에서 일하다 보니 밤낮없이 방송하고 프로그램 만들고 부대끼다 보니 보람 있었지만 지치기도 해서 퇴직하면 원래의 나로 돌아가 맘껏 게으름을 피우며 탱자탱자 놀려고 했다. 그런데 습관이 무서운 거였다. 습관이 인생을 만든다고 오전 9시면 어김없이 요망한 강아지 모카가 날 잡아끈다. 밖으로 나가자고 난리를 치니 어쩔 수 없이 강아지랑 동네 공원 얕은 언덕을 누비며 산책한다. 찬란한 아침 햇살, 높게 쭉쭉 뻗는 나무들 사이로 아름다운 자연, 산듯한 바람을 맞으며 작은 행복을 느낀다. 출근하는 젊은이들을 보니 그 얼굴색에 생기가 없다. 학교 가는 학생들을 봐도 가방이 너무 무거워 보인다. ‘아, 용케도 나는 저 시절을 잘 건너왔구나. 휴! 감사하다. 지금 이날들이….’


영국의 역사가 피터 라슬렛(Peter Laslett)은 1989년 저서 《A Fresh Map of Life》(신선한 인생 지도)에서 인생을 4단계로 설명했다. 제1기는 태어나서 교육을 받는 시기, 제2기는 일하며 사회적 성취를 이루는 시기, 제3기는 개인적 성취의 시기 그리고 제4기는 돌봄이 필요한 시기라고 했다. 제3기 인생(The Third Age)을 맞으면서 나는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남들이 보기에 쓸데없고 하찮은 것일 수 있어도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하자. 잘하는 것은 이제 그만두고, 못하지만 재미있는 것 관심 있는 것을 해보자고.


그 첫 번째 시도가 노래다. 아나운서치고 춤과 노래 못하는 사람 별로 없다. 난 ‘THE VOICE of SBS’ 상까지 받은 목소리 아주 좋은 아나운서인데 어찌 노래는 그리 못하는가? 그 흔한 예능 프로그램도 안 나간 이유가 사실 춤과 노래에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나처럼 뒤늦게 공부하는 사람에게도 문이 활짝 열려 있는 서울사이버대학을 알게 됐고 인터넷으로 공부하니 학교 갈 시간에서 해방되는 자유로운 면학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성악과에 편입했다. 체계적으로 음악 전반에 대한 수준 높은 공부를 시키니 나의 교양 수준이 올라가는 것 같아 재미있기도 하고 성악 실기 시험 준비하느라 헉헉거리기도 한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의 2013년 국제 성인 역량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 성인은 나이가 들면서 인지능력이 떨어지는 정도가 미국인이나 일본인보다 훨씬 심하다고 한다. 미국인은 10대에서 30대 중반까지는 한국인보다 인지능력이 처지지만, 30대 중반 이후에는 한국인을 능가한다. 미국은 놀랍게도 50대가 넘으면 인지능력이 오히려 상승하는데, 평생교육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할 뿐 아니라 능력과 성과에 따라 보상받는 노동시장이 존재해 근로자 본인의 역량 계발에 대한 유인이 크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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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억지로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다. 먹고 살기 위해 살아야 했던 우리는 제3기 인생 신중년의 시기에 들면서 성숙과 성취의 시기로 나아가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자기 탐색이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어린 시절의 꿈들을 떠올려 보고, 부끄럽고 자신 없어도 하고 싶었던 소망을 소환해 볼 일이다. 액티브 시니어 수가 많아지면서 노동시장이 유연해질 것이다. 각 분야의 전문가로서 살아낸 베이비붐 세대들의 자산을 단순노동직에만 몰아넣지 말아야 한다. 지자체들은 업종 특성에 맞는 다양한 시니어 직업군을 개발해 프로그램을 만들고 유입시키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연구해 주기 바란다.


제3기 인생을 잘 보내야 제4기 의존의 시기 또한 최소화할 수 있다. 산업사회 자본주의 맥락에서만 보면 젊은 노년기에 접어든 베이비붐 세대도 사회적 자원이 아닌 사회적·경제적 소외와 배제 계층으로 내몰린다. 이 안타까운 현실의 해결 방안을 찾아내야 한다.


전 생애주기에 따른 학습의 기회를 열어 주는 평생교육기관으로서 각 지역의 대학들이 신중년학과를 개설하고 우수한 대학 시설과 교수자원의 공급이 인생의 오후를 맞는 시니어를 위해 확장되길 바란다. 다양한 교육과 장학제도, 일자리 연계까지 정부 기관과 학교가 협력하면 제3기를 맞은 인생들은 알차고 보람 있게 내일을 준비할 것이다. 나의 제3기 인생은 새로운 성취와 함께 봉사의 시간으로 채우고자 한다. 공부해서 남 주자. 배워서 같이 나누자. 가치 있게 같이 나가는 동년배가 더 많아지면 좋겠다.


60이 넘은 나이에 다시 학생이 된 나는 사는 게 재미있다. 직업란에 학생이라 쓸 수 있으니 웃기기도 하고 특히 문화예술행사에는 학생 신분이라 할인도 많이 된다니 즐겁지 아니한가? 찾아서 하는 공부에 중퇴자는 별로 없다고 하니 일단 가보는 거다. 오늘 아침도 굿모닝이다. 모카 산책시키며 귀에 이어폰을 꽂고 성악 수업을 들으며 나는 찬란한 여름을 기다린다. 내가 재미있게 사는 이유다.

*출처 <디멘시아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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