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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제공: Ilya Pavl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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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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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혜경

 

전 KBS 아나운서
전 대만국영방송(CBS) 아나운서
대만문화대학 신문방송대학원

이 얘기 저 얘기

외국에서 30년을 지내고 한국에 온 지 3년, 돌아온 한국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남편은 우리가 한국 물정을 탈북민보다도 모른다며 웃곤 했다.


대만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대만 국영방송인 CBS에 근무하던 중 한국이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과 단교를 하게 됐고 우리는 넓은 시장을 향해 대만에서 중국으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대만이나 중국이 같은 중국이라 생각했던 우리의 생각은 많이 빗나갔고 사회주의 국가의 많은 잔재들이 우리를 당황시켰다.


북경에 도착했을 때가 11월 중순, 밖에 눈이 내리고 있었는데 아파트에 난방이 들어오질 않았다. 잠을 설치고 관리실에 문의하니 중국은 정부에서 11월 20일부터 3월 말까지만 난방을 공급한다는 것이다. 난방비는 집의 평수와 비례해 4개월 10일 치를 은행에 선불을 해야 했고 날씨 변화에 따른 융통성은 꿈도 못 꾸었다.


그 후부터 매년 3월 31일 밤 12시가 되면 아직 영하의 날씨임에도 라디에이터에서 딱딱~거리며 들려오는 난방 끊기는 소리가 어릴 적 망태 할아버지 소리보다 더 무서웠고 우리는 매년 4월 1일이면 추위를 피해, 도망가듯 해외로 여행을 떠났다.


얼마 후 외국인에게도 부동산 정책이 개방돼 아파트를 샀는데, 마침 한국 경동보일러가 중국에 진출해 있어서 바닥에 난방 호스를 깔고 보일러를 설치하니 난방이 끊겼을 때 자가 난방을 할 수 있어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아파트에 소문이 다 나서 그런 걸 처음 본 중국 사람들이 신기해하며 구경을 와 바닥까지 만져보곤 했고 나중에 집을 팔 때도 그 덕분에 몇 사람이 경쟁까지 하며 쉽게 팔 수 있었다.


여기서 잠시, 중국은 아파트를 사면 내부가 시멘트로 칸만 나뉘어져 있고 거실 천정에 백열등 한 개 달려 있는 것이 전부이다. 화장실 배관부터 방수, 타일, 집안의 전기 배선은 물론 천정 공사에 방문도 달아야 하고 거의 집을 반은 짓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집집마다 공사를 해야 하고 공사 기간도 다르니 입주 후 3년 정도는 소음에 시달려아 했다. 대신 집마다 다른 인테리어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은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모르는 중국 사람을 만나도 집 구경 좀 시켜달라고 하면 자랑하듯 쾌히 보여주었고 덕분에 중국 사람들의 문화나 취향을 많이 엿볼 수 있었다.


앞집은 호주 교포인 한국분이 사셨는데 자주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그분은 중국어를 거의 못하면서도 용감하게 살고 계셨는데 중국에 갓 왔을 때 안경점엘 갔다고 한다. 여직원이 너무 예쁘고 친절하여 “What is your name?” 하고 물었더니 영어를 모르는 아가씨가 “팅부동”이라고 대답을 하더란다. 팅부동(聽不憧)은 중국어로 못 알아듣는다는 뜻이었는데 그분은 이름이 팅부동인줄 알고 열심히 외웠다나? 그리고 다음날 찾아가 “미스 팅부동”계시냐고 물었는데 그때 직원들의 재미있던 표정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중국은 중산층 이상 아파트에 거의 엘리베이터 걸이 있다. 주민이 타면 층수를 눌러주는 것이 고작 그들이 하는 일이다. 넓지도 않은 공간에서 종일 오르내리며 서 있는 모습이 늘 안타까웠는데 그게 고용 창출을 위한 정부의 정책이라고 했다.


그중 한 엘리베이터 걸이 늘 책을 보고 있었고 우리가 탈 때마다 한국어를 몇 마디씩 물으며 외우곤 했다. 시간이 흘러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너무 기특해 우리 집에 불러 한국어를 가르쳐 주었는데 그 노력과 발전이 가히 놀라웠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일이 미래도 없고 힘들어 그만둔다며 인사를 왔기에 어디로 가냐고 물으니 아직 미정이라고 하기에, 마침 남편이 천진의 삼성전자 대표와 친구 사이라 그곳에 취직을 시켜 보내주었다.


한 달 후 첫 월급을 탄 아가씨가 천진에서 2시간 차를 타고 과일을 사 들고 찾아와서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사천성에 부모님이 사셨는데 한국분이 취직을 시켜줘서 천진으로 간다고 하니 엄마가 잘 알지도 못하는 외국인이 널 왜 그렇게 좋은 곳에 소개하겠냐며 분명히 인신매매라고 절대 가지 말라고 극구 반대했다는 것이다.


성실함을 바탕으로 그 아가씨는 조장이 되고 반장이 되더니 급기야 한국에서 파견 나온 직원과 결혼까지 하게 됐고 남편은 젊은 나이에 생애 첫 주례를 서게 됐다. 남편을 인신매매범으로 의심했던 사천성 엄마는 결혼식장에서 처음 남편을 보고는 계속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지금까지도 흐뭇한 기억이다.


중국의 규모가 있는 식당에 가면 요리가 나올 때 1.2.3이라고 종이에 쓴 번호표가 접시 귀퉁이에 붙어 나온다. 그 음식을 만든 요리사의 고유 번호이다. 식당 규모가 크니 요리사가 많고 사람에 따라 맛 차이가 있으니 특별히 맛있었으면 기억했다가 그 번호로 주문을 하면 됐고, 그것은 셰프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같은 식당에서도 어느 요리는 2번 어떤 요리는 4번에게 주문하는 식이었다. 많은 손님을 접대해야 했던 나는 어느 식당의 몇 번 셰프가 생선 탕수를 몇 번은 동파육을 잘하고 그런 식으로 수첩 가득 메모해 가지고 다녔고, 모시고 간 손님들은 다 맛있다고 환호했다.


또 한 가지 황당했던 기억이 있다. 중국은 가스비와 전기료를 은행에 돈을 내면 카드에 금액만큼 입력을 해주고 집에 가서 기계에 카드를 꽂으면 사용이 가능하다. 그래서 일단 입력을 한 후에 다시 은행에 가서 예비용을 입력해 두었다가 정전이 되면 재빨리 카드를 꽂아야 된다.


섭씨 40도가 되던 어느 찜통 같은 날, 집에 손님을 초대해 에어컨을 빵빵 틀고 전기 프라이팬에 신나게 고기를 구워 먹던 중 정전이 됐다. 아뿔싸~ 그런데 깜빡하고 카드에 예비용 충전을 해두지 못했다. 은행은 내일 아침이나 돼야 갈 수 있는데... 그 날의 민망하고 비참했던 뒷이야기는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그래도 남편은 자주 얘기했다. 정부가 고지서를 보낼 필요도 없고 연체 때문에 머리 아플 일도 없는 현명한 제도라고.


친하게 지내던 선교사 부부가 계셨는데 주로 하북성의 오지로 선교를 다니셨다. 어느 날 그 분이 하북성에 다녀오더니 들려준 이야기가 인구도 얼마 안되는 오지에 그래도 은퇴한 치과 의사 한 분이 계셨단다. 어떤 분이 이를 빼러 갔는데 노인 의사가 눈도, 조명도 어두워 엉뚱한 옆의 이를 뺐다고 한다. 그러더니 걱정 말라고 옆의 이는 무료로 빼주겠다고 했고, 환자는 이를 2개 뺐는데 한 개 값만 냈다며 마을에 와서 자랑을 했다고 한다. 디지털 시대에도 그렇게 순수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소문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그 후부터 이를 빼러 갈 때 의사가 헷갈리지 않도록 이에 빨간 실을 묶고 갔다고 한다.


또한 보철 시설이 안 돼 있는 그곳에서 크라운을 씌우거나 이를 해 넣을 수 없으니 그 의사가 고안해 다른 사람이 뺀 이를 버리지 않고 모았다가 그중 크기가 적당히 맞는 것을 골라 이를 뺀 자리에 가는 철사로 엮어 넣어주는데 그 이로 고기까지도 씹을 수 있었다고 하며 시장에 가면 뺀 이를 모아 좌판에 놓고 파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우리는 설마...라며 믿지 않았고 그 선교사는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을 두 배로 크게 뜨며 사실이라고 했다.


한국과 대만에서 아나운서를 하다가 사표를 내고 중국으로 가면서 나는 아나운서 생활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주변에서 나를 계속 아나운서로 살게 해 주었다. 북경을 비롯해 많은 지역 행사의 원정 사회를 봤고, 다양한 내레이션 녹음, 중국인 한국어 웅변대회 심사위원장을 맡으며 매년 입상자들을 한국으로 유학시키는 보람된 일도 있었다. 


중국의 부동산 개방과 함께 한국이 투자 유치 대상 1위 국가가 됐으며 한국의 투자자들이 전세기를 타고 대거 날라왔다. 나는 건설 회사에서 의뢰받은 한국어 투자 설명회 자료를 녹음 제작하는 일로 몇 년 동안, 즉 2008년 북경 올림픽으로 부동산이 정점을 찍을 때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자연스럽게 투자의 노른자위 정보를 미리 입수하게 된 나는 본의 아니게 복부인 행렬에 들게 되었다. 어설픈 복부인이 운 좋게 터뜨린 한 방과 함께 남편의 목소리도 아주 작아졌다.^^


태국의 치앙마이는 은퇴 후에 살고 싶어 하는 도시 가운데 세계 3위로 손꼽히는 도시다. 우리는 중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오기 전에 2년만 치앙마이에 살아보기로 하고 건너갔는데 그 매력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10년을 살았다.


치앙마이에 처음 가니 한국 주부들이 태국말을 전혀 못하고 살고 있었다. 이유인즉슨 YMCA에서 태국어를 가르치는데 영어로 수업을 하니 배울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용기를 내어 대표로 태국어를 배우기로 했고 엄마들 성화에 못 이겨 두 번째 날부터 수업을 갔다 오면 배운 걸 그대로 무료로 주부들에게 가르쳤다. 대신 질문은 사절. 내가 배운 거 외에 답해줄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들은 한국어로 태국어를 배우니 속이 시원하다며 학생이 점점 늘어 30명 가까이 되었다.


태국어 왕 초보자가 태국어 선생이 되었으니 정말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남을 가르친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날 배운 걸 그대로 가서 가르치니 저절로 머리에 입력이 됐고 책임감에 수업도 더 집중해서 듣게 됐던 것이다. 그래서 나이가 60 가까우니 배운 걸 기억이나 하려나 싶었는데 학교에서 시험만 보면 만점을 받는 이상한 일도 벌어졌다. 그렇게 엉뚱발랄 나의 태국 생활은 시작됐고 10년간의 행복한 시간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왔다.


새로운 나를 찾아 떠났던 30년간의 여행을 끝내고 다시 한국의 품에 안긴 나는, 인생 제2탄을 쏘아 올리며 어리버리한 한국 촌놈으로 살고 있다. 그런데 참 신나고 즐겁다. 그 옆에 아나운서클럽이 함께 해 선후배님들이 나의 울타리까지 되어 주시니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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