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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인터뷰

줌인(Zoom-In) - 인터뷰 / 지역탐방①

“ 너는 유난히 발음이 정확하고 예쁘구나. !”

對談 김주혜 KBS시청자본부 팀장 : 임병룡 한국아나운서클럽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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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아나운서클럽 웹진 팀이 새해 기획으로 지역탐방 코너를 신설했다. 이번 겨울 호엔 강원도 원주를 찾아 김주혜(63년 入社)회원과 김윤한(70년 10월入社) 회원과 자리를 함께했다.

 

먼저 김주혜 회원을 만나봤다.

 

고교시절부터 문학소녀의 꿈을 키워가던 한 여학생이 한 선생님으로부터 “너는 유난히 발음이 정확하고 예쁘구나!” 칭찬을 듣게 된다. 그리고 “아나운서 꿈을 가져 봐도 좋을 것이란 귀띔도 받는다. 그녀는 지난 1963년 대학 졸업(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과 동시에 문화공보부 총무처 시행, 방송직 시험에 응시해 당당히 아나운서 합격의 쾌거를 이룬다.
 

김주혜 아나운서가 바로 이 얘기의 주인공이다. 웹진 팀이 김주혜 회원을 원주에서 만났다.

< KBS원주방송국 청사 >

1. 아나운서 시험 합격 후 첫 근무 당시 애기 좀 들려주십시오.

 

1963년 봄, 대학 졸업 후 고등학교 정교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경기도 소재의 모 고교 국어교사로 가려던 중 신문에 총무처 시행 공보부 주관의 방송職 모집공고를 보게 됐어요. 잠시 망설이던 교사로서의 길과 아나운서의 꿈 사이에서 고민도 잠깐, 국가공무원으로서 신분보장과 염원하던 아나운서 지원으로 생각이 굳혀지게 됐지요. 당시에도 방송 직군 특히 아나운서에 관한 관심이 엄청나게 높았다고 생각되네요. 논문과 실기 등을 거쳐 무려 135대 1이란 관문을 뚫고 합격이란 쾌거를 이뤄낸 셈입니다.

 

합격과 동시에 3개월의 연수를 마치고 발령을 받았습니다. 선망하던 중앙방송국은 아예 차례를 포기한 채 지방인 남원국에서 첫 근무를 하게 됐습니다. 약간 소외된 감은 있었지만, 지방국 특유의 지역적 포근함, 열성 팬들의 환호 등으로 나름 아나운서로서 보람과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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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시 중앙방송국 시절 함께 근무하셨던 분들 짚어주시죠.​​

 

동기로는 남 6명, 여 6명인데 그 후 중앙국 아나운서실에 오니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임택근, 이광재, 강찬선. 최세훈 선배들이 계셨어요. 이런 쟁쟁한 선배들 앞에서 주눅 들기 일쑤였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며 방송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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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 선배께선 대북심리전단 방송 요원으로도 활약이 컷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대북심리전단 방송은 북한 일반 주민보다 공군 조종사(비행사)를 대상으로 “인민군 조종사 여러분” 이렇게 시작됐고 어민을 대상으로 한 “북한 어부 여러분∽”방송도 계속했습니다. 또한 ‘노동자 여러분에게’를 비롯해 ’자유의 메아리‘ 방송도 남다른 사명감 속에서 줄기차게, 차분하게 해왔고요.


특히 기억나는 건 지난 83년 2월 전 국민을 경악하게 했던 대남 공습경보, 이웅평 대위 미그기 귀순 사건입니다. 당시 동료들이, “이웅평 귀순 조종사가 여자 아나운서의 간곡한 귀순권유 방송을 듣고 귀순을 결심했다.” 말하면 김주혜 아나운서가 일약 유명해질 텐데 라는 농담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4. 문학의 꿈이 결국 아나운서 시험 합격이란 새로운 이정표와 만났는데 지금 돌아보면 두 분야 중 더욱 애착이 가는 쪽은 어딘지?

 

사실 문인(文人)에의 꿈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아나운서가 돼 더 보람 있었고 행복했습니다. 어떤 분야든 자신의 분야에서 일인자가 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네요.


오랜 세월 아나운서 전문직으로 방송인의 길을 걸으면서 자부심과 긍지를 잃어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5. 재직 중 주로 맡았던 괄목할 만한 프로그램 좀 소개해 주십시오.

 

저는 주로 농·어촌 프로그램과 주부 대상 프로그램, ‘희망의 등대’ 등 소외계층을 주 청취 층으로 하는 방송을 많이 한 편입니다. 특히 68년도 월남 파병 장병 대상‘파도를 넘어서’는 이규항 아나운서와 더블자키로 방송한 기억이 새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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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조정실 자료 사진 >

6. 우리들의 삶은 결국 ‘꿈의 실현’이라고들 하는데 돌아보면 꿈이 실현됐는지요?

 

지난 63년 설레는 꿈과 포부로 시작한 방송인의 길이 지역국과 중앙방송 무대에서 이뤄진 셈입니다. 퇴직까지 34년이란 연륜이 희로애락 속에 나름대로 결실을 본 거지요. 참 오랜 세월 방송인으로서 세상을 보는 안목이 길러졌고 이를 바탕으로 시대와 역사의식을 갖는 내공도 깊어졌다고 할까요.

7. 남산 시절 근무하셨던 분들을 주축으로 ‘목멱회’ 모임 회장도 맡고 있다고 얘기 들었습니다. 간략하게 소개해 주십시오.

 

남산의 옛 명칭이 목멱(木覓)인데요. 처음 남산에 KBS가 있어 당시 이곳에서 근무하던 선·후배들이 한 달에 한 번 만나 회포를 나누며 건강도 묻고 지나간 실수담도 나누는 친목 모임입니다.

8. 원주에 정착하게 된 계기가 있는지요?​​

 

현업시절 원주방송국에 근무했었고 서울과의 접근성도 좋은 점 그리고 등산을 좋아하는 데 치악산이 저를 반겨주고 안아주는 친밀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멀지 않은 치악산을 통해 ‘ 멍 때리는 시간’을 자주 갖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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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지철 원주방송국장과 함께 >

9. 현재 하시는 일, 하루를 어떻게 보내시는지? 건강은?​​

 

원주 정착 10여 년 동안 원주노인복지관에 등록하고 어학 공부, 음악프로그램 감상 등을 즐겨 하고 있습니다.


지역행사의 MC도 많이 맡고 있고, 복식 호흡을 위해 하모니카, 우크렐레 등도 꾸준히 배우고 있고요. 나이 들면서 아프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욕심 버리기도 제 작은 신념이기도 하구요.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 선배님 더욱 건강하시고 늘 행운이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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