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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인터뷰

만나고 싶었습니다 / 맹관영 아나운서 편

對談 맹관영 아나운서: 유지현 편집위원

“신()은 한 사람에게 여러 가지 재능을 몰아주지 않는다는데 이분 아나운서에게는 예외(?)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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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을 생각하면 선배님이라기보다 선생님, 사감님이라는 호칭이 자연스럽게 들릴 만큼 까마득한 후배들에게는 매우 엄격해 보이는 분, 
그런데, 잘못하면 회초리라도 드실 듯 그 절도 있고 엄격한 모습 뒤에는 마치 야단치고 나서 어루만져주는 아버지처럼 인자하고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분, 비실비실한 후배들이 부끄럽도록 여전히 단단한 건강함으로 위력을 뽐내시는 분.

 
이즈음 되면, 아마 짐작되실 텐데요.
오늘 제가 용인으로 달려와 찾아뵌 분은 아나운서로서 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 국가를 지킨 장교로서, 그런가 하면 서예 화가로서 문예에 이르기까지 후배들과 우리 사회에 참 반듯한 귀감이 되어 오신 분입니다. 선배님과 사모님의 환한 미소와 함께 거실 곳곳의 작품들이 따스하게 맞아 주는 느낌이었는데요, ‘우전 맹관영’ 선배님 만나 뵙겠습니다.

만남 – 작품 향기 가득한 곳에서 따스한 미소로 환대

유: 선배님, 안녕하세요? 소개가 괜찮았을까요? 혹시 꾸지람 들을 부분은 없었을까요?

맹: 아니, 너무 거창하게 소개를 해 주셔서 몸둘 바를 모르겠는데, 기숙사에 규율을 잡는 사감선생님 같은 것이 어울렸는지 몰라도, 후배들을 보면 지금은 모든 게 다 이뻐 보이고 자랑스러워 보이고, 착해 보이고 그렇습니다.

유: 그래서, 엄격해 보이시지만 그 이면에 따뜻한 선배님의 모습을 뵐 수 있어서 저도 조심스러우면서도~, 왠지 푸근하게 선배님에게 기댈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마음으로 왔습니다.

교육자로 사회 첫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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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년 9사단 소대장시절: 맨 왼쪽 >

유: 교육자로 출발해 성우에서 아나운서, 또 군 장교로 아주 강직하신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참 섬세한 내면의 세계를 표현하신 예술가로도 활동하셨는데 어떤 점이 가장 선배님다운 면모라고 생각하세요? 어떤 연결점이 있을까요?

맹: 모두 내가 가진 ‘끼’와 ‘열정’이 다양하게 표출된 것이겠죠. 대학 졸업 후 ROTC 1기로 2년간  최전방에서 복무를 마치고 제대 신고를 위해 스승이셨던 월탄 박종화 성균관대 교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 자리에서 교수님이 손수 편지를 써주셔서 상명여고 설립자인 배상명 학장님께 소개되었고, 1965년 국어교사로 임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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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명여고 교생실습 시절, 배상명학장과 >

유: 일찍이 대학 시절부터 눈에 띄는 학생으로 계속 발탁되는 발군의 실력이 자연스레 그런 경력들로 이어졌군요. 상명여고에서 선배님을 바로 등용할 정도면 학교에서 인기도 대단하셨을 것 같은데, 문학도와 같이 국어를 가르치는 총각 선생님이 여고생들에게 로망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까요?

맹: 그래서 학장님하고 처음 인사했을 때 바로 다음날부터 출근하되 2년 이내에 결혼한다는 약속을 하라셨어요. 여학교니까 뭐 가능치도 않은 얘기지만, 스캔들이란 게 있었던 모양이에요. 아내와 결혼은 약속 기간이 지난 3년 후인 1968년에 했습니다.

유: 교직 생활에서 특별히 기억되는 학생이나 에피소드가 있어요?

 

맹: 교편생활 2년 반 동안 가르친 제자 중 가수 펄 시스터스의 멤버 배인순이 생각나는데, 가수활동으로 무단결석을 하게 돼 많이 혼낸 기억이 있습니다.

타고난 목소리, 준비된 자질. 방송에 입문

유: 성우에서 교육자, 군 장교, 아나운서로 변신도 많았고,한 가지도 어려운 일들을 잘 해내셨고, MBC 성우 1기, ROTC 장교도 1기, 첫 번째 문을 많이 여셨는데, 첫 번째 시작한다는 의미가 크잖아요. 도전정신이 남다르셨나요? 방송에 대한 꿈은 어떻게 키워오셨나요?

맹: 어릴 때부터 주변에서 "목소리가 타고났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좋은 목소리를 적절히 사용할 곳으로 방송국이 떠올랐고, 대학 2학년 때 CBS에서 성우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했습니다. 1960년 기독교 방송국 성우로 활동을 시작하며 방송계에 발을 디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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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년 CBS성우시절, 오른 쪽 금보라 한 사람 건너 >

1961년 MBC가 창립되면서 1기 성우로 합류했습니다. 이후 ROTC 1기 교육으로 결석이 많아 전속계약에서 제외되었지만, 군 복무를 마친 후 교직 생활을 하다 1967년 여름, TBC 동양방송 아나운서 모집에 응시했습니다. 임택근, 황우겸 선배들의 방송을 들으며 "나도 저렇게 멋지게 방송을 해보고 싶다"는 꿈을 키웠습니다. 17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하며 아나운서가 된 이후 만 30년 동안 방송 활동을 이어갔고, 성우 출신이라 내레이션을 많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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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지표 단기4284년 금곡교 6학년 때 >

유: CBS, MBC, TBC와 KBS 여러 방송사에서 방송 역사를 함께 해오셨는데, 당시의 방송 환경과 방송의 사회적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궁금해요.

맹: 지금과 비교하면 참 열악한 상황으로 방송했습니다. 기자들이 육필로 쓴 기사로 뉴스를 진행했는데, 종종 전화로 받아쓰거나 뉴스 중에 바로 들어온 기사를 받아 뉴스를 하는 일도 다반사여서 악필 때문에 고생 많이 했죠. 지금은 프롬프터를 보면서 하지만 예전에는 원고를 전부 외워야 했어요. 대한뉴스도 25분짜리 녹음에 마지막 1분 남기고 NG가 나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해서...상당히 힘든 세월을 보냈어요. 그런데 방송사 간 경쟁은 심했어요. 교사 경력이 있어 TBC에서 신인 아나운서 교육 담당을 했는데 타 방송사 아나운서가 인기를 얻으면 그 방법을 예로 교육 시켜서 성공도 했어요.

유: 당시 방송에서, 또 아나운서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질은 무엇이었나요?

맹: 정확한 발음과 표준어 사용이 기본입니다. 또 말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엮는 능력과 임기응변이 필수적입니다. 요즘 방송들을 보면 교육을 철저히 못 받아서 그런지 틀리는 친구들이 많더군요.

유: 방송 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은 무엇인가요?

맹: 대한 뉴스 내레이션을 맡았던 경험이 대표적입니다. 당시 극장에서 영화 상영 전에 모든 국민이 대한 뉴스를 보며 제 목소리를 들었죠. 특별히,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 당시 국립묘지 안장식 중계를 맡았던 것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웅산 사건이 났을 때, 여의도광장에서 국민장 발의식 중계를 위해 철저히 준비한 원고가 빗물에 번져 내용을 알아볼 수 없게 된 긴박한 현장에서 상황을 잘 극복했던 경험 등은 아나운서에게 임기응변이 참 중요하다는 큰 교훈이 되었습니다.

타고난 예술가의 끼

유: 그런데, 방송 생활을 30~40년간 이어오신 후, 서예뿐만 아니라 문인화까지 섭렵하신 그 예술적 재능은 언제부터 발현되기 시작했나요?

맹: 어릴 때부터 서예와 그림에 자연스러운 재능을 보였습니다. 초등학교 때 습자 시간에 항상 우수작으로 뽑혔고, 아버지께서 붓글씨의 기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5학년 때는 전국 학생 그림 공모전에서 당선되어 참고서 표지화로 선정되는 등 "그림 천재"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예술적 끼가 드러나게 됐습니다.

유: 그때부터 예술적 재능을 살려 학창시절과 방송 활동 중에도 습작을 계속 하셨나요?

맹: 6.25 전쟁 당시 피난을 오신 미술 선생님 석연 이경배 선생님께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사생 시간을 통해 독특한 그림 표현력을 인정받았고, 선생님으로부터 "풍부한 재능이 있다" 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주위에서 서울대 미술대학 진학을 권유받을 정도로 가능성을 인정받았지만, 가정 형편상 미대로 진로를 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배운 기본기를 바탕으로 작품 활동을 지속하며, 서예와 문인화를 통해 예술적 끼를 꾸준히 발전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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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제2회 개인 전 전시회, 전영우 선배 축사 >

유: 국문학도로 문학적 꿈도 가지셨을 것 같은데, 미술뿐만 아니라 글에도 자질을 보이셨나 봐요?

맹: 그렇습니다. 학창 시절 시를 지어 상을 받기도 했고, 그림뿐 아니라 글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공부 또한 우수해 초등학교 때 전교 1등으로 졸업하며 도지사 상품으로 국어사전을 받는 등 학창 시절부터 "천재"라는 말을 들으며 그림, 글, 학업 등 여러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뭘 해도 잘한다."라고 평가해 귀여움과 주목을 많이 받았습니다.

서예문인화가로서 예술가의 철학

유: ’준비된 예술가‘인 듯, 방송 현장에서 나오자 곧바로 두 차례 개인전과 초대작가 등으로 활발히 예술 활동을 꽃피우셨네요?

맹: 1997년 백악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 많은 전문 작가들이 제 작품을 보고 초대작가로 추대했습니다. 공모전 경력 없이 초대작가로 선정된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고, 이후 국전 심사위원을 맡으며 본격적인 서예문인화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현재는 한국서예문인화 원로총연합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원로 작가들의 명예를 지키고 있습니다.

유: 서예와 문인화를 같이 하시니 작업 도구와 기법에서도 특별히 신경 쓰시는 점이 있겠어요?

맹: 전통 붓과 물감을 주로 사용하는데, 수묵화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 물과의 조화를 중시합니다. 석채(돌가루 물감)를 사용하는 작가도 있지만, 저는 일필휘지의 매력을 더 중시합니다. 큰 붓은 간판 글씨처럼 대형 작업에 사용하고, 중필을 주로 활용해 글씨와 그림의 세밀한 표현을 추구합니다.

유:선배님 작품을 보면 예쁜 색감의 과일과 동물들이 많이 보이던데, 특별히 선호하는 소재가 있는지요?

맹: 저는 결실을 상징하는 열매, 특히 포도를 즐겨 그립니다. 포도는 "일경백엽(一莖百葉)" 즉, 하나의 줄기에서 수많은 잎과 열매를 맺는 모습을 통해 번창과 다산의 상징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주렁주렁 열린 포도처럼 결실이 풍성한 삶을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여전히 진행 중인 도전과 열정

유: 그런데, 전통 예술인 글, 서예, 그림에 이어 국악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시잖아요?

맹: KBS FM에서 방송했던 ‘흥겨운 한마당’이라는 국악 프로그램을 3년간 진행하며 국악에 대한 흥미가 깊어졌습니다. 이후 국립국악원에서 5년간 거문고를 배우며 전통 음악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특히, 거문고는 장중하고 우렁찬 음색으로 남성적이고 선비다운 매력에 이끌려 한갑득(韓甲得)류 산조를 선택해 배웠습니다. 그리고, 국립국악원에서 거문고를 배우는 동안 명무전(한국 전통 춤 공연)을 자주 관람하며 춤에 대한 관심도 커졌습니다. 국악과 춤은 제게 또다른 예술적 영감을 주며, 그림과 서예와 함께 제 예술 세계를 확장시켜 새로운 도전의 자극이 되고 있습니다.

유: 지금까지 여러 분야에서 큰 획을 그어 오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도전해 보고 싶으신 것이나 새로운 목표가 있을까요?

맹: 저는 타고난 '옛 끼'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미술, 서예, 문인화뿐 아니라 국악과 춤까지 다양한 예술 분야에 관심을 가지며 도전을 이어왔습니다. 이제 나이가 많아지면서 많은 것을 건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해왔던 서예와 문인화는 제 평생 함께할 수 있는 예술이라 생각합니다. 이는 단순한 취미를 넘어 제 인생철학과 열정을 담는 작업으로, 운명할 때까지 이어갈 수 있는 분야입니다.

건강 비결

유: 이렇게 건강을 유지하며 오랫동안 활동하실 수 있었던 비결이 뭘까요?

맹: ‘타고난 끼’처럼 건강도 타고난 체질이 영향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가볍게 걷고 골프를 좀 합니다. 
 

그리고, 젊은 시절부터 식사 전에 반주를 즐기는 습관이 있었는데,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 식사 전 동동주로 반주하시는 모습을 보고 자연스럽게 배운 것이지요. 성인이 된 후에는 매실, 복분자, 오미자 등을 담가 반주를 즐겼습니다. 예전에는 아침, 점심에도 반주를 즐겼지만, 심장 수술 이후 건강과 나이를 생각하고, 집사람의 걱정도 한몫해서 이제는 아침 반주도 안 하고 절주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술이 무조건 건강에 해롭다 거나 좋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체질에 따라 다르고, 과하지 않게 즐긴다면 해롭지 않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니, 각자의 체질과 건강 상태를 고려해야겠죠.

방송, 서예 문인화 예술, 사회의 후배들에게

유: 핵가족화와 개인주의가 확산되는 현대사회에 자녀와 대가족 생활로 가족관계의 본보기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측면에서, 그리고, 달라진 방송 환경에서 후배들의 방송을 바라보시는 측면에서, 또한, 전통 예술이 젊은 세대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노력의 측면에서 후배들에게 도움 말씀을 주신다면요?

맹: 현대 방송 환경은 과거와 많이 달라졌지만, 후배 아나운서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매우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분야만 깊게 파기보다는 다양한 분야를 두루 익히며 사람들과 공통된 분모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방송뿐 아니라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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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대한민국서예문인화 총연합회장 취임 >

그리고, 옛날 법을 익혀서 그걸 응용해서 창작을 해내는 자기만의 세계를 표현해내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이 제일 중요한데, 이건 작가들의 작품에서만이 아니라 방송에서도 옛 선배들이 했던 방송을 거울삼아서 그걸 응용해서 현대인에 딱 적합한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면 제일 바람직한 방송인 또 예술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아 · 나 · 운 · 서' 사자성어

유: 끝으로, ‘한번 아나운서는 평생 아나운서’라는 가치 아래, 아나운서클럽 회원들 모두 ‘천직’이라는 소명으로 선택했고 또 임해오셨을 텐데, ‘아나운서’로 사자성어를 만들어본다면 어떻게 표현하시겠어요?

맹: ‘아’, 아름다운 
‘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운’명에만 따르지 말고,
‘서’서히,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히 자기의 길을 닦고 자기의 가장 큰 장점을 키워나가는 것이 성공의 비결입니다.
 

유: 긴 세월 방송과 예술에 헌신하신 맹 선배님 행로의 열정과 건강 상태로 보면 앞으로도 오랫동안 쉼 없는 부지런함과 창작의 세계를 기대하게 합니다. 여러 면에서 후배들에게 멋진 롤 모델로 걸어가시는 선배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참 존경스럽고 행복한 마음으로 말씀 들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유: 오늘 인터뷰하면서 이솝우화 중 ‘바람과 해’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어떤 방식으로 움직일까?’라는 것을 설명할 때 이 우화를 자주 예로 들곤 하는데, 우리 맹 선배님은 그 양면성을 다 지니신 분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또한, 선배님을 자연, 특히 나무에 비유해본다면, 강직하고 단단하며 곧은 소나무나 대나무와 같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오늘 선배님의 귀한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맹: 네 반갑습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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