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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제공: Ilya Pavl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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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한민국의 아나운서였다 / 김규홍 아나운서 편

김규홍 아나운서( KBS )에 대한 인터뷰를 앞두고 
설레고 들뜨는 마음이 드는 것은

對談/ 한국아나운서클럽 김규홍 위원장 : 윤지영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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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숙하지만 가볍지 않고, 유머러스하지만 절대 녹록하지 않은 사람. 까마득한 후배부터 세상 누구라도 아우르는 쾌도난마의 재치와 매력은 누가 봐도, 그가 타고난 아나운서임을 인정하게 해준다. 머물지 않고 현재까지도 끊임없는 에너지로 아나운서클럽의 없어서는 안 될 묵직한 존재감으로 늘 자리하는 김규홍 아나운서. 
 

그의 풋풋했던 아나운서 시절로 잠시 회귀하고자 한다.

A 그 시절을 회상하며......

1) 몇 년도부터 방송을 시작하게 되셨는지요?

 

지금으로부터 57년 전인 1968년도에 문화공보부에서 주관하는 공채 1기 아나운서 선발모집에 응시하여 운 좋게 합격하여 자랑스러운 아나운서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방송인이 되기란 방송고시라고 할 만큼 어렵다고 하지만 당시에도 어렵긴 마찬가지였어요. KBS 아나운서 모집 공고가 되면 매년 수천 명의 응시자가 몰렸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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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군 병장으로 제대를 앞두고 아나운서 입사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나운서가 되기로 결심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저의 경우는 1962년 대학교에 입학 후 캠퍼스 방송 요원으로 교내방송 아나운서로 활동하였으며, 1965년 5월에 공군사병으로 자원입대하였고,3개월의 훈련을 마친 후에는 3년 동안 여의도와 김포 비행장의 Control Tower에서 각종 비행기(군용기,민항기 등)의 이·착륙만을 전담하는 관제사로 군대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1968년 5월이면 제대를 앞두고 있는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군 역내 방송 스피커에서 들려주는  KBS 정오뉴스에서 아나운서를 선발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으며, 군 입대 전의 대학 캠퍼스 방송경험과 VUNC-유엔군 총 사령부 방송 참여 또 공군 비행기 관제사로 마이크와 생활을 한 경험에 용기를 내어, 소속 부대에서 시험기간 동안에 외출 허가를 받아 내었고,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준비를 하고 시험을 치른 기억이 납니다. 하여간 군인신분으로 합격하였기에,합격자 연수기간 동안 푸른 공군제복을 입고 연수를 받는 과정에서도 어려운 사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3) 아나운서의 입사 조건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당시 선배께서는 외모가 빼어 나셨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여담이 있으신가요?

 

하 하 하 ~!!! 쑥스러운 질문이네요. 외모 말씀은 저에게 질문을 아주 잘못 하셨군요! 굳이 얘기하자면 제가 학창 시절에 남자가 피부가 그렇게 깨끗하냐는 말은 간혹 들은 적은 있지만  외모 얘기는 말할 자격이 조금도 없군요~!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부끄부끄입니다요 ~!

B 아나운서가 되어 방송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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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절마다 방송환경과 아나운서의 역할도 조금씩은 변해왔습니다. 한창 방송하시던 때의 방송환경은 어떠했나요?

 

제가 1968년에 아나운서를 시작했습니다만 그 당시에는 일반 국민들이 방송국이라고 하면 아나운서가 제일 먼저 떠오르며, 방송의 상징으로 생각해 주었지요. 물론 방송의 기본으로 기자,PD, 엔지니어가 있었지만 외형적으로 당연히 노출되는 상징성도 있고, 희소성과 남들이 따라 할 수 없는 타고난 끼라고 할까요? 아나운서라는 직종은 특성이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1960년 1970년대를 생각하니, 주변에서도 인기직업이라며 칭찬을 많이 했지요. 그런데 방송환경을 얘기하자면 월급얘기를 안할 수가 없군요. 당시 국가 공무원 신분으로 경제적으로는 아주 열악했습니다.

1968년 입사하여 첫 월급을 받아보니 그냥 9,000원이었습니다. 저는 첫 근무발령지가 전라도 광주였는데, 하숙비가 5,000원이었습니다. 그러니 나머지 4,000원으로 한 달을 생활한다는 것이 정말 어려웠습니다. 세세한 내용을 말하지 않더라도 아나운서라는 직업 특성상 나름대로 품위유지비도 필요하고 각 방면으로 정말 힘든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2) 특별히 기억에 남는 선배나 동료에 대한 추억이 있으십니까?

 

제가 서울 중앙방송국에 입사 시험을 볼 때 실기시험장인 스튜디오의 문을 열어주시며 안내하셨던 분이 바로 이규항 선배님이셨지요. 키도 크시고 미남형의 모습인데, “아나운서는 저 정도는 돼야 하는데“라고 속으로 느끼며 심리적으로 속된 표현으로 저 혼자 많이 쫄았던 기억이 납니다만, 모든 수험생들에게 어찌나 친절히 대해주시던지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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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실기 테스트로는 불과 30초도 되지 않는 뉴스 원고 낭독을 하고 문밖에 나왔는데, 이규항 선배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11번 수험생은 실기시험은 잘하면 통과될 것 같네요!라고 하신 말씀이 얼마나 기분이 좋고 가슴을 설레게 했는지 지금도 그 기억은  잊혀 지지가 않아요. (지금도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드립니다) 또 동료 수험생인 이정부 씨와는 시험 기간 동안 어떤 영문인지 친구가 되어  지금도 변함없는 우정을 갖고 지내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아나운서 클럽에서는 KBS동기생으로는 박찬숙 전 국회의원, 김영소 전 아나운서실장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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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떤 종류의 방송들을 하셨고 좋아하시던 방송은 어떤 종류였습니까?

 

저는 주로 라디오 방송을 많이 했습니다. 조 편성이 되어 4교대로 근무할 당시 TV뉴스도 간혹 했습니다만 옴니버스(omnibus) 형식의 매일 낮, 2 시간짜리 프로그램인 오후의 교차로를 수년간 진행을 한바 있고, 특별히 말씀드리자면 첫 발령지인 광주에서 근무할 때에는 제가 적극 주장하여, 서울의 동아방송에서 ‘최동욱의 3시의 다이얼 팝송 아우어’를 본떠 KBS광주에서도 오후 4시부터 매일 30분간 즐겨듣는”김규홍의 팝송아우어”프로그램을 PD 겸 아나운서로 2년간 disk jockey로 진행하였습니다..

4) 기억에 남는 방송이나 방송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으십니까?

 

저는 부산과 청주에서도 순회 근무를 한 적이 있는데 KBS청주에서 근무할 때는 지역 방송으로 농구와 복싱 중계를 한 적도 있으며, 또 기억에 남는 것은 제가 대학시절 승마 동아리에 가입해 취미생활을 한 경험으로 인해, 아나운서가 된 후 태릉에서 세계 승마경기 선수권대회를 단독 중계방송을 하기도 했는데, 대학시절 다양한 활동 경험이 훗날 직장 생활하면서도 큰 효과를 보게 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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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1983년도 8월 추석 즈음에 최초로 남북 이산가족 교환 방문과 예술 공연단의 평양 방문 시에 합동방송 일원으로 방송사로서는 KBS, MBC에서 각각 3명씩만 선발되었는데 KBS는 예술 공연 사회로는 김동건 아나운서, 리포터로 김규홍 등 모두가 긴장된 가운데 방북을 하여 색다른 방송 경험을 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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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당시 북한에서 제일 큰 고려호텔에 투숙했는데 첫날의 첫 거리 인터뷰로 호텔 앞에서 유치원생(6살 정도)인 어린이를 선택해 인터뷰를 하면서, 제가 즉흥적으로 유치원에 가면 무엇을 배우나요? 라고 질문을 했는데, 이 어린이는 조금도 주저 없이 기다리던 질문을 받은 양, 대답하기를 “우리는 유치원에가면 미국 놈 때려잡는 법을 배웁니다.”라고 아주 큰 목청으로 서슴없이 대답하여 나도 놀랐지만  녹화된 이 인터뷰 장면은 당일 저녁에 국내 방송, 신문 등에 크게 보도되었고, 물론 세계적으로 큰 화젯거리가 되었었습니다.

 
아울러 이 단 한방의 인터뷰 장면으로 인해, 남북 관계의 실상과 함께 반공 교육의 큰 효과를 보여준 저의 생생한 방송경험이었습니다. 그 후 저는 각 사회단체나 모임에 초청되어, 한동안 분주하게 초청연사로 불려(?) 다닌 적이 있습니다.

5) 방송국에서 선후배나 동료 혹은 협업을 하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았던 일이 있으신가요?

기억에 남는 일은 주로 숙직을 하면서 숙직조와 친교를 나누는 일이었습니다, 밤 12시 마감뉴스를 마치고 사무실에서 전기곤로로 라면을 야식으로 끓여먹는 재미란, 정말 즐거웠던 추억이었고, 지금 기억으로는 최평웅 선배님의 라면 끓이는 솜씨는 아무도 따라갈 수가 없는 일인자 였어요 ~!

그리고 숙직을 마치고 아침 9시에 퇴근하고 나오면 4명의 조원끼리 조조할인 영화를 보러간다든가 ,또는 멀리 춘천 쪽으로 가서 소양강댐 근처에 가서 쏘가리 매운탕을 먹고 오는 등  조 편성 근무의 아름다운 추억들이었으며 이런 것들은 모두가 서울 예장동 서울 중앙방송국 시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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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본인은 스스로 어떤 아나운서였다고 생각하십니까?

 

나의 아나운서라는 직업에 100% 만족하고,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고 하는데, 한번 아나운서는 영원한 아나운서입니다. 아나운서 출신들은 소속 방송사가 달라도 동질성에 대한 인식이 특히 강하여 몰랐던 사람도 과거 아나운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헤어졌다 만난 친척이나 가족처럼 어색하지 않게 다정함을 느끼게 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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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아나운서클럽에 관한 얘기도 간략하게 부탁드립니다.

 

40여 년 전쯤 될까요 ? 아나운서 모체라고 할까, 또는 탄생이랄까?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황우겸 선배님께서는 여느 원로 선배님보다도 직업의식이 강하시고 성격적으로 어떤 조직을 만들어 이끌어 가는 데는 탁월하신 분이신데, 황 선배님과 저는 한국JC라는 사회단체에 함께 활동하므로 저를 아끼시면 서도 아나운서 클럽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저에게 초창기부터 각종 일을 시켜 자연스럽게 아나운서 클럽을 남 보다는 더 관여하며 알게 되었고 한국아나운서계의 호적 계장이라는 별칭까지 얻게 되는 등 아나운서클럽과는 뗄 수 없는 인연이 되었습니다. 

물론 제가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수십 년을 서로 의논하며 함께 수고해준 박민정 감사님과 황인우 교수이신 두 분을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그래서 저는 이분들과는 친남매 오누이 같다는 표현을 자주 얘기하는 이유입니다.

C. 잠시 생각에 빠지다....

1) 아나운서로서 걸어오신 것 행복하십니까?

 

물론 행복합니다. 아마도 아나운서를 하셨던 선배님이나 후배님 등 모든 퇴직하신 아나운서들께서도 저와 같이 만족해하시며 과거의 추억에 행복해하고 계실 것 같군요.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누구나 추억을 상기하며 남은 인생을 더 아름답게 꾸며간다고 합니다만 저 역시 게으르지 않게 그렇게 노력할 것입니다.

2) 앞으로의 바람

 

현재 한국아나운서 클럽은 제 11대 회장님까지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열한 분의 역대 회장님들께서 40년 가까이 훌륭히 발전시켜 오셨습니다. 그 결과 행사 때마다 행사장 정면에는 현수막에 “아나운서는 한 가족”이라고 씁니다.

3) 하시고 싶은 말씀으로 마무리.

 

끝으로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은 제가 지난 12월 16일(월) 퍼시픽 호텔에서 갖은 2024년도 송년회 자리에서 너무나 분에 넘치는 상을 받았습니다. 이 상은 저로서는 방송인으로 지내오며 받았던 한국방송대상등 어떤 상보다도 그 가치와 의미는 비교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며~,아나운서 클럽을 더욱 사랑하고  봉사하겠다는  각오를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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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진 회장님과 회장단, 그리고 모든 회원님께 저를 이토록 격려해 주신 사실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아나운서클럽의 모든 회원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김규홍 선배님 귀한 시간을 오랫동안 할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욱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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